나이란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다. 두 손으로 막아보려 애써도, 끝내는 흘러가버리고야 마는 시간의 흐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그 강물 앞에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 늙어간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나이를 먹고 시간이 흘러 늙어 간다. 살아온 인생의 흔적만은 나에게 흉터처럼 남겨놓으며, 숨이 다 할 때까지. 집에서 다 못 먹인 이유식 한입이라도 더 먹이러 놀이터까지 쫒아나와 아이의 뒷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엄마처럼 먹기 싫어도 계속해서 나이를 먹인다.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성장한 줄 알았지만 결국, 성장은 나이 들어가는 것과 늙어감을 좋게 부르는 말이었다.
어렸을 적 나는 하루라도 빨리 성장해 엄마 아빠를 도와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었다. 성장에 목말랐고, 우적우적 밥으로 나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그렇게 나는 단순히 몸만 커진 어린아이 같이, 나는 어른이 되었다.
이제는 어린 시절 나를 돌아보며 젊음을 나에게 투자한 엄마 아빠가 이제야 보였다.
어느 하나 모르는 것이 없던 척척박사 엄마는 가는 귀가 먹어 옆에서 말하는 소리조차 제대로 듣지 못하게 되어있었고, 산더미처럼 쌓은 나무 장작을 번쩍 들어 올리던 그 돌쇠 지게꾼 아빠는 자기 몸 하나 달리기조차 버거운 노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젊음이 나를 키웠고, 내게 내어준 젊음의 크기만큼 엄마 아빠는 쇠약해져 있었다.
나 혼자 스스로 내 삶을 일구어 간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엄마가 가족들 사이에서 이런 말을 했다.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쓸 거야."
주변 사람들 중에 나이가 들고 병약해지고서 병원신세로 자식들을 수년간 괴롭히다 끝끝내 돌아가신 분들이 계신 까닭에 엄마의 선택이 누구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의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본인도 살아있다는 것이 병원에 가만히 누워 호흡기 달고 숨만 붙어 있다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계셨다.
하지만 그 말에 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미웠다. 인생의 전부를 자식에게 바치고 젊음을 희생한 분의 마지막을 하루라도 더 붙잡고 싶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살려 낼 거야"라는 말은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벽 앞에서 담을 허물어 버리고서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그저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누구나 나이 들고 늙어가며 세대를 넘어 또 다른 미래를 만들어 가는 모습은 지극히 자연적이다. 삶의 흐름을 막지 않고 흘러가는 데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이치다. 나에게 부모님의 존재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듯이, 나 또한 이제 아이들을 키우며 내 젊음을 내어 주고 있다. 내 새끼 입으로 들어가는 내 젊음은 아깝지 않다. 부모님도 나를 키우며 그래 왔음을 이제야 실감한다.
중국의 장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했다.
인위적인 것이 없이 자연스러운 것. 이것이 바로 나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인위적으로 나이를 먹지 않을 수 없다. 흘러가는 시간을 막아볼 수 없고, 젊음을 되찾아 다시 새롭게 태어 날 수 없다. 중국의 진시황도 불로장생을 쫓았지만 결국엔 늙어감을 막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의 삶도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아기에서 유아, 어린이를 거쳐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어 노인이 되는 삶의 흐름 속에서 계속해서 어린이로 살고 싶다고 떼쓰지 않아야 한다. 나이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존경받고 우러러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 삶 속에서 나의 존재를 알고, 그 역할을 다 하는 것이 참된 성인이 되는 길이 아닌가 싶다. 나 또한 매일 되뇌어 본다. 과연 나는 내 역할을 다하고 있는가.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역할도 변해간다.
과거에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따라가던 아이였지만, 이제는 누군가를 이끌어야 할 사람이 되었다.
삶은 역할의 연속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한다.
그 흐름을 부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인생을 담담히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