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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을 먹고 사는 사회

by 김휘성

뉴스와 각종 매체는 불안을 먹고 자란다. 사람들의 감정이 불안에 흔들릴수록, 그 영향력은 강해지고 시선은 더 오래 머문다. 주가가 불확실성에 출렁이면 언론은 앞다투어 ‘폭락장’이라는 말을 내세워 시청자들의 심장을 조이게 만들고, 반대로 지수가 상승하면 금세 ‘버블’이니 ‘위험한 낙관’이니 하는 말로 다시금 미래의 불안을 조장한다. 시시각각 쏟아지는 속보는 빨간 배너를 단 채로 긴박감을 높이며, 시청자에게 지금 당장 이 정보를 보지 않으면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 정보가 실제로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묻기도 전에, 이미 감정은 반응하고, 생각은 그 뒤를 따라가게 된다.

특히 강렬한 영상을 동반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이 자극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고층 빌딩 화재, 무장 괴한의 등장, 충격적인 사회 범죄. 이런 이미지들은 곧바로 반복 재생되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그 정보의 유효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하는지를 중심으로 서사가 짜인다. 정치 뉴스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정책의 본질이나 제도 개선과 같은 구조적인 문제보다, 누가 더 도덕적인가, 누가 더 많은 실수를 했는가, 혹은 그 가족의 과거는 어떤가 같은 주변부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사람들은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쪽의 과거를 들추며 분노를 쏟아낸다.

정보는 논쟁거리가 되고, 논쟁은 분노를 부추기고, 그 분노는 또다시 매체의 소비를 유도한다. 이 악순환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자극적인 이야기, 더 빠른 정보, 더 격한 감정을 향해 몰려가며, 결국 자신이 왜 이 이야기를 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감정만 남기고 돌아선다.

정작 중요한 질문은 뒤에 남는다. 이 정보는 정말 나에게 필요한가?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 뉴스에 반응하는가? 나는 그 사건을 바꿀 수 있는가? 대부분의 정보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일어나며, 내가 아무리 분노하거나 흥분한다고 해도 그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유명 연예인이 고층 빌딩을 샀다는 기사에 부러움이 올라오고, 정치인의 말실수에 분노하며 댓글을 쓰고, 북한의 핵실험 예고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직접 변화시킬 수 없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상황에 반응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뿐이다.

내 마음이 왜 부러움을 느끼는지, 그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하다. 연예인의 성공을 보고 내 삶이 초라해 보일 때, 그 초라함의 기준은 어디서 온 것인가. 분노는 어디에서 출발했고, 무엇을 향한 것인가. 이러한 성찰이 없다면 우리는 매일 타인의 삶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정작 자신의 삶을 살아갈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과 모방심을 경계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본질과 필요를 이해하지 못할 때 타인을 따라가며 괴로워진다.”
우리는 연예인의 삶을 보며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고, 정치인의 말실수에 분노하며 정의감을 착각하지만, 정작 자기 삶의 본질적 욕구는 외면하고 산다. 쇼펜하우어는 외부 세계가 아니라, 내면의 고요함 속에서 인간의 진짜 자유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결국 내가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이유는, 나 자신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보는 어디에나 있지만, 그것을 걸러내고 나에게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는 선택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감정은 자동적으로 솟구치지만, 그 감정에 따라 반응할지 말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자극과 불안의 사회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나를 향해 말을 건넨다. 이게 위험하다고, 저건 놀랍다고, 누군가는 성공했고 누군가는 망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말들에 무작정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닌 타인의 삶을 따라 움직이게 되고, 그렇게 조금씩 나를 잃어간다. 결국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세상의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는 힘이 아니라, 무수한 정보 앞에서 나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중심을 잡는 힘이다. 이 중심은, 자극을 줄이고 고요히 나를 들여다볼 때 조금씩 회복된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불안을 소비하는 삶이 아니라, 감정을 가려 쓰는 삶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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