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는 10년 이상 홀로 안경원을 운영해 온 베테랑 안경사다. 비록 구석진 동네 골목 2층에서 운영하지만, 알음알음 찾아오는 단골손님은 아내의 싹싹한 태도와 바가지 없이 저렴한 가격에 지인들을 대동하고는 꼭 아내의 안경원을 찾는다. 소문나지 않은 숨은 맛집 같은 곳이랄까.
나는 처음에 자영업이라고 하면 사장이고 오너니까 장사하고 싶은 대로 열고 닫고, 쉬고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직장인인 나와 달리 자유로운 삶을 사는 아내가 부러웠다. 누구의 명령 없이, 타인의 제약 없이 쉬는 날은 내가 정하고, 일하기 싫으면 닫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름 나도 셔터맨으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도 내심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을 모르는 나의 헛소리였다.
아내는 늦어진 퇴근시간에 야근 이후 안경을 찾으러 오겠다는 손님이 있으면, 한 늦은 밤까지 일을 해야 했고, 비록 휴무일을 정해두긴 했지만 쉬는 날에도 전화가 오면 어김없이 당장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했다. 손님으로 북새통을 이루는 날은 없었지만 꾸준히 찾아오는 단골손님들 덕분에 근근이 꾸려가는 가게는, 마음처럼 쉽게 쉴 수만은 없었다.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손님맞이와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지쳐가던 어느 날, 코로나는 아내에게 어퍼컷을 날렸다. 가뜩이나 걱정을 간식처럼 달고 사는 사람에게 나는 주식과 코인, 부동산의 실패로 삼중고를 선사했고, 더구나 코로나로 인한 무급휴직으로 인해 내 월급도 반토막 나고 보니, 그 고통의 무게는 아내에게 더욱 크게 다가왔다.
나날이 사는 게 힘들어지던 때, 결국 아내는 우울증으로 약을 달고 살았다.
주변에 티 나지 않게 속앓이 하던 감정이 하루하루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걸 나도 서서히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날은 아내가 말없이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만 하다, 조용히 옆에 앉아 같이 창밖을 바라보는 걸 택했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 순간 아내는 나를 바라보며 아주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하나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어설픈 위로보다, 말없는 그 시간이 더 깊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안경원 속 우물 안에만 갇힌 삶에서 아내를 꺼내 주고 싶었다.
조금 다른 세상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고 싶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에 도전해 보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레 권했고, 시큰둥하게 시작한 그 도전은 아내에게 슬며시 활력을 안겨주었다. 이후 주말 아침마다 안경원을 열기 전, 동네의 유명한 빵집에서 오전시간 알바를 시작했다.
좁은 우물을 벗어나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공기 속에서, 20대 젊은 친구들과 함께 일하는 아내의 모습은 이전보다 훨씬 밝아보였다. 주말이면 긍정적인 젊은 기운을 가득 안고 돌아오고는 날아갈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왔다.
젊고 활기찬 우물 속에서 다시 기운을 얻고, 다시 웃음을 되찾은 아내.
2년째 주말 빵집 아르바이트생인 안경원 사장님 아내는 그렇게, 조용히 삶의 의미를 다시 짓고 있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아내의 지난 시간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다시금 느낀다.
어설픈 공감의 말보다 따뜻한 침묵이, 조용한 공감이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그저 곁에 있어주는 일, 말없이 함께 시간을 견디는 일, 그 속에 담긴 마음이야말로 진심이라는 걸.
아내가 말없이 손에 쥐고 있던 무거운 짐은, 누군가가 대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그 무게를 같이 느껴주길 바랐던 것이 아닐까.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힘든 시간을 묵묵히 견뎌낸 아내의 삶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고, 그 곁을 지켜본 나는 비로소 진짜 ‘함께’의 의미를 배웠다. 다정함은 때로 말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 전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함께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