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케치북다이어리 Feb 04. 2022

페라리가 사랑(?)한 단어 베를린

페라리는 예전부터 모델명에 베를린(Berli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인가 싶겠지만 근거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F12 베를리네타(Berlinetta, 발음상으론 베르리네따에 가깝습니다)를 떠올릴 수 있겠네요. 또 2015년에 나온 488 GTB도 있습니다. GTB는 그란투리스모 베를리네타(Gran Turismo Berlinetta)의 줄임말이죠.

F12 베를리네타 / 사진=페라리


페라리 225 S 베를리네타 / 사진=favcars.com


488 GTB / 사진=페라리


스털링 모스가 추억을 떠올리며 250 GTB를 운전하고 있다 / 사진=페라리


어디 그뿐입니까? 1970년대 초반에 나와 약 10년 동안 판매됐던 512 BB도 있습니다. 여기서 BB는 얼굴에 바르는 크림이 아니라 베를리네타 복서(Berlinetta Boxer)의 앞글자입니다. 복서 엔진이 들어간(실제로는 V12 엔진임) 베를리네타 타입의 512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프랑스에도 있습니다. 베를리네트(Berlinette)라고 하는데, 알피느 A110 베를리네트라는 모델 기억하실 겁니다.

512 BB / 사진=favcars.com


A110 베를리네트 / 사진=알피느


페라리가 쓰는 베를리네타, 알피느가 사용한 베를리네트는 ‘작은 베를린’이란 뜻의 단어로 정확하게는 이탈리아에서는 작은 베를리나(Berlina), 프랑스에서는 작은 베를린(Berline)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쿠페형 모델에 사용됩니다. 2인승 2도어, 또는 2도어에 2+2 좌석 자동차가 여기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프랑스 사전엔 쿠페에서 파생된 로우 프로파일 바디 유형에 쓰인다고 되어 있는데 로우 프로파일은 낮은 차체라는 의미인 듯하네요. 어쨌든 쿠페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베를리네타라는 일종의 조어는 페라리가 대중에 알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후 같은 이탈리아 자동차 브랜드뿐만 아니라 오펠이나 미국의 쉐보레(예전 카마로에 사용된 적 있음)도 사용한 적 있죠. 지금은 자취를 감췄지만 시트로엥 C4 뒤에도 한때  '베를린’이라는 단어가 붙은 적이 있습니다. 시트로엥을 세상에 널리 알린 초기 모델 트락숑 아방에도 베를린이 붙었죠. 아니, 왜 다들 이렇게 베를린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댔던 걸까요?

C4 베를린 / 사진=시트로엥



베를린이 자동차 단어가 된 사연

그 이유를 알려면 17세기 독일로 가야 합니다. 1650년 이후로 알려져 있는데요. 당시 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이었습니다. 선제후라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권이 있는 군주를 의미합니다. 흔한 표현으로 끗발 있는 권력가였습니다. 이 양반이 어느 날 마차 하나를 만들라고 지시합니다. 장거리 여행에 맞는 안락하고 튼튼하고, 또 고급진 그런 마차를 주문했겠죠.


이때 네덜란드 출신으로 베를린에서 고급 장교이자 건축가로 맹활약하고 있던 필립 드 히이세(Philip de Chiese, 네덜란드어에 최대한 맞게 쓰려 노력했습니다.)가 마차 만들기를 책임졌습니다. 그는 마주 보며 앉는 2개의 긴 의자와 그를 덮은 폐쇄형 바디, 4개의 바퀴, 그리고 앞엔 마부가 앉은 공간, 뒤엔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마차를 만들었습니다.

베를린 마차 / 그림=위키피디아


공간 구분이 분명하다. 마치 3박스 자동차처럼 / 사진=위키피디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 마차를 타고 프랑스 파리로 떠났습니다. 이동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의 눈에 띄었을까요? 파리에 도착하자 그곳 부자들의 큰 관심을 받고 똑같은 마차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받게 됩니다. 루이 14세에겐 금도금이 된 것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주문은 프랑스는 물론, 네덜란드, 러시아, 스웨덴 등, 전 유럽으로부터 밀려 들었죠. 필립 드 히이세는 베를린에서 본격적으로 마차 만들기에 들어갔습니다. 인기 폭발이었던 이 마차는 나중에 베를린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베를린 마차’로 불립니다. 단순하죠? 그리고 2인승 모델로도 개조가 되는데 마치 2열 좌석을 싹둑 잘라낸 것처럼 생겼다고 해서 프랑스에선 자르다의 의미인 쿠페라는 단어가 덧붙여졌습니다.

스웨덴의 베를린 마차 / 사진=위키피디아


포르투갈의 베를린 마차 / 사진=포르투갈 국립 마차 박물관


마차의 시대가 끝이 나고 자동차의 시대가 왔습니다. 하지만 명칭은 마차로부터 이어진 게 많았죠. 3박스 자동차를 미국에선 세단(Sedan), 영국에선 살룬(Saloon), 독일에선 리무지네(Limousine), 그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스페인, 포르투갈 등을 포함)에선 각각 베를린(Berline)과 베를리나(Berlina)로 불렀는데, 왜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베를린이라는 단어를 세단의 의미로 썼는지 이제 아셨을 겁니다.


화려함 그 자체 / 사진=위키피디아


페라리 창업자였던 엔초 페라리는 쿠페라는 용어보다는 구별되며 더 이탈리아적인 느낌의 단어를 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작은 베를리나(세단)’를 뜻하는 ‘베를리네타’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페라리가 쿠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250 GTO도 있었고 250 GTB도 있었으며, 250 GTC도 있었습니다. GTC의 C는 쿠페를 뜻하며, 그 외에도 베를리네타와 구별해 쿠페를 붙인 모델은 여럿 있었습니다.

250 GT 쿠페 / 사진=페라리


마차는 사라졌고, 그 마차를 만든 이도 사라졌습니다만 마차에서 유래된 이름만큼은 이렇게 명맥을 이어오고 있네요. 오늘 내용은 엔초 형님이 아니었다면 오래전 잊혀진 단어가 되었을지도 모를 베를리네타에 대한 일종의 TMI였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