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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memike Oct 29. 2020

방황하는 존재에게

스물아홉번째 이야기



방황(彷徨)

이리저리 헤매어 돌아다님.



흔히 삶에 있어서 방황은 특정 시기와 함께 찾아오는 듯하다. 사춘기, 오춘기, 그리고 갱년기. 일생일대의 선택의 기로 앞에 서서 ‘방황’이 찾아온다. 할까 말까. 선택의 중압감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도 무력해지고, 슬퍼지고, 처참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허해진다. 정도는 다르겠지만 누구나 그러한 경험을 한다. 방황하는 이에게 이 말이 도움이 되진 않는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방황하는 존재는 부유한다. 너무나 무겁지만 때로는 너무나 가벼워 둥둥 떠다닌다. 그 정처 없는 움직임이 긴장감으로, 무서움으로 다가온다. 긴장감은 몸에 힘이 들게 한다. 사실 힘을 빼야 하는 시점인데 말이다.


방황하는 존재는 부유한다.


스쿠버 다이빙을 하면 물 속 깊이까지 들어간다. 물에서는 부력이 작용하여 몸이 가벼워지는 듯하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자 하지만 부력 때문에 쉽게 되지 않는다. 그러한 조바심 때문인지 발만 허우적댈 뿐 산소만 더 소모한다. 그래서 초심자는 가벼워질 무게 만큼 무게(weight)를 허리에 차고 물에 들어간다. 하지만 다이빙 마스터들은 들숨과 날숨만으로 물 속에서의 위치를 쉬이 바꾼다. 산소를 머금고 조금 기다리면 올라가고, 산소를 뱉고 기다리면 내려간다. 하지만 그들이 마스터(master)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처음에는 무게를 차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물에 익숙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긴장을 풀고 숨에 집중하면 언젠가는 무게 추 없이도 다이빙을 할 수 있다



방황하는 존재에게는 적당한 무게 추가 필요한가보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즘 캠핑족들이 많아지면서 소위 ‘불멍’이 유행이다. 불쏘시개만 잘 자리잡게 하고, 공기가 잘 통하게 하고 가만히 있어본다. 그러다 탈 것과 공기만 제때에 잘 넣어준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서 불을 바라본다. 그게 뭐라고 묘하게 빠져든다. 그 묘하게 빠져드는 무언가가 관념의 무게 추이다. 하지만 관념만으로 무게가 작용하지는 않는다.



‘바라보는 것’에는 물리적 실체가 중요하다. 어찌됐든 우리는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정신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물리적 실체가 없다면 그만큼 허황된 것 또한 없다. 자주 가는 카페의 사장님을 볼 때마다 저 분은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빛 잘 들어오는 창 앞에서 커피만 주구장창 내리고, 좋은 음악에, 커피를 홀짝거리는 그 기분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 사장님은 커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맛있는 커피를 내리겠다는 그 마음이 원두에, 물에, 그리고 잔에 전달된다. 그분은 그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현실을 마주하고 계셨던 것일 수도. 혹은 그냥 기분 좋게 그 자리에 서 있었을 수도.


'바라보는 것'에는 물리적 실체가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이 바라보는 대상, 목표, 혹은 이상이 될 수 있는지 여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흔들리는 존재에게 약간의 정신적, 물리적 무게를 더해줄 수 있으면 그만이다. 내 자신의 무게를 다루는 데에 익숙해지면 무게 추를 벗어 던지면 된다. 그런 순간이 오면 아마 흔들림 속에서도 자유롭고 편안할 것이다. 언젠가는 오겠지 그런 날이.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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