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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memike Nov 23. 2020

언제나 생각보다 어두울 것이고,
생각보다 밝을 것이기에

서른다섯번째 이야기


일하면서……너무 이상한 걸 많이 봤어.
야간근무를 하면 말야, 세상의 망가진 부분들이 보여.
지나치게 뚜렷하게 보여.
「덧니가 보고 싶어」중에서, 정세랑 



현대사회는 그 어느때보다 더 집단주의 사고 속에서 움직인다. 영어를 배우면 가장 먼저 배우는 말만 봐도 그렇다. 보통 “What is your name?’ 다음에는 “Where are you from?”, “I’m from Korea.”를 배운다.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함에 있어 이름만큼 중요한 게 국적임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일까. 사실 정체성과 이름의 관계에 관해서도 의문이 들지만 이는 나중에 다뤄보도록 하겠다. 무튼 우리는 항상 각자의 경계를 그리고, 그 안에서 세계를 만들어 살아간다. 철저히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세계는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개인 각자의 세계와 현실 세계. 전자는 주관적일 가능성이 농후하고, 현실 세계는 객관적이라고 믿고 싶다. 개인의 세계는 한 입장을 취해 현실 세계를 가늠한다. 가늠할 수 없는 것을 가늠하고자 하여 틀리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개인 본인은 그 입장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각자의 심지를 굳게 지켜나가고자 한다. 본인의 판단을 틀렸음을 자각하는 순간 ‘현실에 타협한다’는 말이 나온다. 실제 현실 세계와 각자의 우물, 혹은 세계의 괴리감에서 나오는 절망이며 자괴감일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보는 세계가 실제 현실이라면. 좋고 나쁨의 판단이 의미가 있을까. 일정 부분 각자의 세계와 현실 세계는 같을 것이며, 많은 부분 상이할 것이다. 그 둘이 비슷할 경우 개인은 희망을, 대척점에 있을 경우 고뇌를 갖게 되기도 한다. 각자 생각하는 이상이 있을 것이고, 그 이상과 현실 사이의 거리감이 느껴질 때마다 ‘현실 감각’이라는 것을 체험하기 마련이다.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왜 이럴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고 절망에만 빠지면 뭐하나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다시 괴리감에 스친 상처가 아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현실'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몸으로 느끼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가깝다.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은 그저 이해하고자 했을 뿐이다. 우리는 일부만을 각자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이 전부다. 전체는 일부의 집합이다. 부분이 부분만으로서 존재할 수 없듯이, 전체 또한 전체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분 간의 관계가 전체의 형상을 어렴풋이 그리는 거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유추한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다고 슬퍼하지 말자.



언제나 생각보다 어두울 것이고, 생각보다 밝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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