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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memike Dec 12. 2020

농담은 내게 생의 의지였다

마흔한번째 이야기


농담

실없이 놀리거나 장난으로 하는 말



인체는 인체 내의 물질과 다른 물질은 이물질이라고 판단하여 제거한다고 한다. 우리 몸과 이물질이 싸울 때 열이 나기도 하면서 잠깐 아프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느끼기 시작했지만 내가 세상의 이물질인지, 세상이 내게 있어 이물질인지 분간이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열이 나기도, 아프기도 하는 것 같다. 이런 나 때문에 세상도 같은 시련을 겪고 있을 것이다. 확실한 건 우리 모두 이형 단백질이라는 사실이다. 



생(生)은 고(苦)다. 행복이란 것은 그 고달프고 힘든 것 사이사이에 가끔 찾아오는 것 같다. 인생의 대부분은 힘들고, 고달프고, 씁쓸하다.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전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삶은 힘들지만 우린 언제나 각자의 행복을 원한다. 세상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혹자의 기원도 그게 그 사람이 조금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서이지 않을까. 아무튼 생(生)은 고(苦)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나온 인류 최고의 발명 중 하나가 농담이다. 



우리는 왜 농담을 할까. 재미를 위해. 그렇다면 누구의 재미를 위해서일까. 재미가 없는 농담은 의미가 없을까. 하지만 농담 자체가 원래 실없는 것이고, 무용한 것이지 않나.



2019년에 개봉한 영화 조커(Joker)에서 아서 플렉은 광대다. 그가 살고 있는 도시 고담은 황량하고, 칙칙한 잿빛의 도시다. 그러한 도시의 광대는 이질적이다. 그는 아동 학대의 피해자였고, 망상 속에서 컸다. 하지만 그 망상이 실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아서 플렉은 아무도 웃지 않는 이상한 상황에서 웃는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오히려 희롱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아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농담(joke)을 던지는 코미디언이 되고자 한다. 포기와 허무함으로 가득한 도시, 웃지 않는 사람들, 웃기는 사람들, 그리고 그 밖에 서 있는 아서 플렉은 낯설다. 그에게 농담은 사회적 동화에 대한 갈망이었고, 생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농담은 슬프다.  



우리의 민족성을 이야기할 때 해학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고전 시가, 판소리와 탈춤, 그리고 민화부터 시작하여 ‘배달민족’을 ‘딜리버리(delivery)’의 민족으로 바꿔 업계의 판도까지 바꾼 현재까지 해학은 아마 우리의 피에 흐르는 듯하다. 공무원 합격과 멋에 대해 이야기하며 태평양 건너에서 시작한 ‘외힙(외국 힙합)’을 우리나라 현대 정서에 맞게 바꾼 래퍼 머쉬베놈도 그 연장선에 있다. 


우리는 왜 농담을 할까.


때로는 자조적이고, 그저 웃기기도 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을 때도 있다. 해학은 슬픔과 고통의 승화였으며, 힘든 삶을 이겨내고자 했던 삶의 지혜다. ‘농담을 던지다’라는 말이 있다. 흔히 무거운 것은 ‘던지다’와 함께 쓰지 않는다. 농담은 가벼운 것이다. 하지만 그 농담의 기저는 무겁다. 영화 조커의 아서 플렉에게 농담은 타인과 연결될 수 있다고 믿은 유일한 접점이었다. 판소리와 탈춤은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저항이었다. ‘공무원 합격’과 ‘몰러유’를 외치는 머쉬베놈의 가사는 본인 가치관의 피력일 것이다. 농담은 지독한 삶 속에서 잠깐이라도 숨을 트게 하고자 하는 생의 의지다. 



여전히 농담이 되고 싶습니다. 간절히 농담이 되고 싶습니다.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의 입속에서 슈팅스타처럼 톡톡 터지고 싶은
마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가벼움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는
무게를 가늠하며, 지치지 않고 쓰겠습니다.

정세랑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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