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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memike Jan 08. 2021

정답이라는 최면

마흔아홉번째 이야기


지인 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대입에 도전하는 사람이 생겼다. 펜을 잡고 하는 공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과를 졸업하고 처음 펜을 잡는다는 사정을 들었다. 여러 번 도전하는 데 도가 튼 내가 새해부터 고나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도전하고자 하는 사람이 여러 번 도전한 사람에게 잔소리를 듣는 아이러니.



“아 이거 진짜 어렵네. 이 문제는 쉬운데, 이런 문제를 못 풀겠어.”



“이거도 쉬운 거야. 처음에 문제를 읽고 푸는 방법이 떠올라야 해.”



참으로 ‘정답’스러운 말이지 않나. 지나가던 개도 할 만한 소리다. 물론 개를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니 지나가던 강아지님은 유감스러워 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날의 추억을 되돌아보니 고등학교 시절의 공부는 참 재밌었다. 사실 공부보다는 정해진 답을 찾는 게 재밌었다. 게다가 많은 부분이 전형적이다. 그래서 유형을 외우는 등의 약간의 노력이면 성적도 금방 올라 공부에 맛 들리기 쉽다. 다만 실제 시험에서는 아는 유형은 다 맞추고, 열에 하나 나오는 신유형에 당황한다. 우리나라는 ‘오지선다’ 공부법을 취하고 있기에 답을 모르고 찍어도 맞출 수도 있어서 중요한 시험애서 하나라도 더 맞추면 그 쾌감은 더할 나위 없다. 이런 ‘정답 찾기’식 공부는 장단이 있기에 그 효용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또 얼마 전에는 동생이 영어 인증 시험을 위해 인강을 들었다. 인강을 들으면서 본인은 이런 코리안 잉글리쉬가 정말 싫다고 했다. 단어를 모르고, 문장을 이해하지 못해도 문제는 풀 수 있게 만드는 족집게 강의가 말이 되냐며 말이다. 강의를 듣지 않고 같은 영어 인증 시험을 봤던 나도 사실은 같은 방식으로 시험을 봤기에 나도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결국은 점수가 중요한 거고, 어떻게 푸는 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어



건축을 공부하면서 진저리가 나도록 들었던 말이다. 사실 대학에 들어온 이후로는 답을 찾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매번 가능성과 타당성에 대한 고민만 했다.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사가 다 그렇지 않을까 싶다. 매사가 선택의 기로에 있고, 우리는 그저 한 가지 선택 밖에 하지 못한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일절 모른다. 선택한 길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네 인생의 가장 고달픈 점은 불안하다는 것이다. 이게 맞는지 싶으면서도 일단 해보는 게 전부여서 그렇다. 이런 세상 속에서 정답을 찾고자 하는 욕구는 최면 같은 거다. 무엇인가를 정답으로 생각하면 일시적으로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이건 그저 선택 가능한 하나의 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음을 말이다.


우리네 인생은 왜 이리도 고달픈지...


원한다면 ‘정답’이라는 최면을 걸자.

단, 그 최면에서 풀려도 답 없는 이 세상을 미워하진 말자.


그 누구도 답을 갖고 있진 않으니까.

우린 그저 가능성 속에 살고 있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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