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아홉번째 이야기
지인 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대입에 도전하는 사람이 생겼다. 펜을 잡고 하는 공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과를 졸업하고 처음 펜을 잡는다는 사정을 들었다. 여러 번 도전하는 데 도가 튼 내가 새해부터 고나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번 도전하고자 하는 사람이 여러 번 도전한 사람에게 잔소리를 듣는 아이러니.
“아 이거 진짜 어렵네. 이 문제는 쉬운데, 이런 문제를 못 풀겠어.”
“이거도 쉬운 거야. 처음에 문제를 읽고 푸는 방법이 떠올라야 해.”
참으로 ‘정답’스러운 말이지 않나. 지나가던 개도 할 만한 소리다. 물론 개를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니 지나가던 강아지님은 유감스러워 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난날의 추억을 되돌아보니 고등학교 시절의 공부는 참 재밌었다. 사실 공부보다는 정해진 답을 찾는 게 재밌었다. 게다가 많은 부분이 전형적이다. 그래서 유형을 외우는 등의 약간의 노력이면 성적도 금방 올라 공부에 맛 들리기 쉽다. 다만 실제 시험에서는 아는 유형은 다 맞추고, 열에 하나 나오는 신유형에 당황한다. 우리나라는 ‘오지선다’ 공부법을 취하고 있기에 답을 모르고 찍어도 맞출 수도 있어서 중요한 시험애서 하나라도 더 맞추면 그 쾌감은 더할 나위 없다. 이런 ‘정답 찾기’식 공부는 장단이 있기에 그 효용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또 얼마 전에는 동생이 영어 인증 시험을 위해 인강을 들었다. 인강을 들으면서 본인은 이런 코리안 잉글리쉬가 정말 싫다고 했다. 단어를 모르고, 문장을 이해하지 못해도 문제는 풀 수 있게 만드는 족집게 강의가 말이 되냐며 말이다. 강의를 듣지 않고 같은 영어 인증 시험을 봤던 나도 사실은 같은 방식으로 시험을 봤기에 나도 달리 할 말은 없었다. 결국은 점수가 중요한 거고, 어떻게 푸는 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어
건축을 공부하면서 진저리가 나도록 들었던 말이다. 사실 대학에 들어온 이후로는 답을 찾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매번 가능성과 타당성에 대한 고민만 했다. 인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생사가 다 그렇지 않을까 싶다. 매사가 선택의 기로에 있고, 우리는 그저 한 가지 선택 밖에 하지 못한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일절 모른다. 선택한 길에 대해서도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네 인생의 가장 고달픈 점은 불안하다는 것이다. 이게 맞는지 싶으면서도 일단 해보는 게 전부여서 그렇다. 이런 세상 속에서 정답을 찾고자 하는 욕구는 최면 같은 거다. 무엇인가를 정답으로 생각하면 일시적으로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이건 그저 선택 가능한 하나의 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음을 말이다.
원한다면 ‘정답’이라는 최면을 걸자.
단, 그 최면에서 풀려도 답 없는 이 세상을 미워하진 말자.
그 누구도 답을 갖고 있진 않으니까.
우린 그저 가능성 속에 살고 있을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