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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memike Jan 20. 2021

올해로 나는 여섯 살이 되었다

쉰두번째 이야기


올해로 나는 여섯 살이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내가 이 나이가 되고자 해서 된 건 아니다. 근데 이 경우는 좀 다르다. 내가 여섯 살이 된 건 온전히 나의 스폰서 때문이다. 스폰서는 20세기에 나를 낳았고, 내게 ‘본명’이라는 걸 주었다. 그런데 웬걸. 21세기가 되니 한 번 주었던 본명을 회수하겠다고 한다. 줬다 뺏는 거만큼 약 오르는 게 없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스폰서가 필요했기에 잔말 말고 내 본명을 반납했다. 그리고는 스님이 주시는 이름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법원에 가서 개명을 하고, 현재의 이름으로 여섯 해 째 살고 있다. 



이름. 그게 중요한가. 우리나라는 태어난 날과 시간까지 따져가면서 사주도 보고, 나름의 의미까지 붙이면서 이름을 짓는다. 그런 지극정성을 보면 이름이 중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이름을 개명하는 건 무슨 심리인가. 정말 너무하다 싶은 이름을 개명하는 걸 제외하고 내 경우처럼 이름을 바꿔 운명을 바꿔보겠다는 시도가 가당키는 한가. 물론 새로 받은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아닙니다. 스폰서님. 이름이 그런 식으로 개인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영미권 국가에서는 대장장이를 하던 사람에게는 ‘Smith’를, 방앗간 주인은 ‘Miller’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다고 내가 Tony가 된다고 세상을 구하고, Peter가 된다고 슈퍼 거미한테 물릴 운명인 건 아니지 않나. 



누군가를 처음 만나면 제일 먼저 통성명부터 한다. 거래처 사람을 만났을 때, 새 학기에, 소개팅에서 우리는 모두 이름부터 밝힌다. 이름이 개인의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못한다. 같은 길동이라고 하더라도 고길동과 홍길동은 다른 사람이다.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난 OOO야, 넌 이름이 뭐니’라는 질문을 해댄다. 정작 원하는 건 한 사람을 이해하는 건데 우리는 다짜고짜 이름부터 묻는다. 만약 나라는 사람을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거라면 내 이름을 물어도 좋다. 다만 나중에 잊어버릴지도 모르는,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그런 이름을 묻는 거라면 나도 그런 이름을 불러줄 것이다. 



누군가와 얘기를 할 때 웬만하면 이름을 불러주려고 한다. 야, 당신, 그쪽, 거기 등의 말보다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그 사람을 더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상대방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성을 붙여서 말하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다. 전자는 약간의 거리감을 두거나 격식을 차리는 인상이 든다. 그래서 친구들에게도 성과 이름, 그리고 의존명사 ‘씨’까지 붙여서 ‘OOO씨’라고 부르며 장난을 치기도 한다. 어찌됐든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친근감의 표현 수단이다. 



맨해튼의 그라운드제로에 가면 끝없이 떨어지는 폭포가 있다. 911테러 이후 절망과 침묵으로 가득한 그 땅을 재건하고자 설계 공모가 열렸다.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는 세계무역센터가 서 있던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을 짓지 말고 거대한 구멍과 사시사철 그 속으로 떨어지는 물로 공간을 비워두자고 제안했다. 그라운드제로 메모리얼의 구멍은 동판으로 감싸고, 그 위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겼다. Maya Lin의 Vietnam Veteran’s Memorial과 Carmody Groarke의 7 July Memorial에도 희생자들의 이름은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름은 부재하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의 표현이다. 

Vietnam Veterans Memorial, Maya Lin


7 July Memorial, Carmody Groarke 


여섯 살 인생에서 느낀 바로는 이름은 안 중요하다면 안 중요하고, 중요하다면 중요할 수 있다. 누군가의 이름이 그 사람의 전부를 의미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사주와 운명을 이야기하면서 이름이 그 사람 인생에 끼칠 영향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그 사람이 좋든 싫든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있어요’라는 현존에 대한 존중이다. 유아의 생존이 어려웠던 시절 서너 살이 되어서야 이름을 붙여주는 관습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떠나간 이들의 이름을 보고, 읽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올라오는 먹먹한 감정은 지금은 사라진, 누군가의 물리적 실체의 잔향이 그 이름에 어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염없이 부르는 이름이 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위의 반복이 나중에는 결국 이름만 봐도 그 사람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순간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이름을 부르자. 그때까지 이름을 부르자. 


911 Memorial Park, Daniel Libesk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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