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네번째 이야기
영화 「소울」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지고 무뎌진 모습을 발견한다. 물건, 사람, 공간, 일상에 닳고 닳아 새로울 것이 없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더 이상 새롭게 느껴질 것이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지루함이 싫어 새로운 자극을 찾아 떠나지만 그게 언제까지나 새롭게 느껴질 수만은 없다. 권태라고 표현해야 할까. 권태감에 짓눌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같은 거창한 질문 앞에 서기도 한다. 이 마저도 자꾸 하면 질려서 하지 않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은 그레이트 애프터, 그레이트 비포, 그리고 지구 세 공간을 빌려 삶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한다. 흔히 하는 질문인 ‘인간은 어디서 나서, 어디로 가는가’에서 ‘어디서 나서’에 해당하는 세계는 ‘그레이트 비포(great before)’, ‘어디로 가는가’는 ‘그레이트 애프터(great after)’에 대응된다. 그리고 실제 삶의 공간은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지구다. 그레이트 비포에서 영혼들은 여러 가지 감정에 대해 배우고, 자신만의 ‘불꽃(spark)’을 찾으면 지구로 갈 수 있는 통행증을 얻고 지구에서 인생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한평생의 꿈이었던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기 전 죽어버린 ‘조 가드너’와 지구에 가고 싶지 않은 영혼 ‘22’가 멘토와 멘티로 만난다. 삶의 목적을 찾기 위해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조와 삶은 무의미하기에 그레이트 비포에 머물고 싶은 22의 태도는 대조적이다.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조는 삶에는 어떤 분명한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창조주 격인 ‘제리’에게 삶의 목적에 대해 묻는다. 자신의 불꽃, 삶의 목적은 피아노였다며 말이다. 제리는 이곳에서는 그런 걸 정해주지 않는다고 말하며 멘토들은 다들 삶의 목적, 의미 같은 것에 착각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불꽃은 영혼의 목적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경제적 문제 없이 재즈 피아니스트로 사는 게 전부였던 조에게는 김 빠지는 소리였다.
꿈을 좇는 삶을 추구하는 조와 달리 22는 모든 일에 냉소적이다. 때려도 아프지 않고 어떤 일에도 상처 받지 않는 그레이트 비포가 지구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느껴본 적은 없지만 살면서 느낄 감각에 대한 회피 반응이다. 견디기 힘든 감정에 대한 두려움이 다른 좋은 감정을 앞서면서 나오는 방어 기제로 보인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듣고, 바람에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을 보고 삶 자체에 호기심을 품는다.
그레이트 비포에는 좋아하던 것이 집착으로 바뀌는 순간 길 잃은 영혼이 되는 공간이 있다. 이는 우리가 삶에 지치는 순간과도 비슷하다. 좋아서 시작했던 일이 오히려 독이 되어 자신을 위협한다. 조는 길을 잃은 22를 구하기 위해 단풍나무 씨앗을 꺼내든다. 그렇게 22는 다시 삶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기억하게 되고, 원래대로 돌아온다.
반복되는 일상은 언젠가는 지치기 마련이다. 경주마처럼 하나만 보고 달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실과 좌절이 두려워 냉소적이게 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일관된 태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그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은 22의 단풍나무 씨앗 같은 ‘삶의 감각’이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온전히 느끼길 바란다. 무뎌진 감각을 다시 날카롭게 만들자. 이왕이면 햇살 좋은 날 가만히 앉아 광합성도 하고 커피도 마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