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여섯번째 이야기
자화상(自畫像)
스스로 그린 자기의 초상화
간헐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는 시점이 찾아옵니다.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가 전공을 정할 때일 수도, 직장을 구할 때가 될 수도 있고, 귀인을 만났을 때도 그러합니다. 저도 그러한 시점을 맞아 프로필 사진을 찍은 적이 있습니다. 이에는 두 개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 프로필 사진에 그간의 짧은 세월이, 나의 이야기가 담길 것이라 생각하여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생각과 경험이 얼굴을 자세히 보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정 시간이 지나 다시 한번 사진을 찍었을 때, 이전의 사진과 새로 찍은 사진을 비교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과연 나는 어떻게 변했을 지 궁금했습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담기 위한 수단으로 저는 사진을 선택했습니다. 그림을 그 수단으로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그림보다는 사진이 사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사진도 조명과 보정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본질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고자 했습니다. 조명과 보정의 방법 또한 당시 나의 가치관을 반영할 것이라는 생각에 말입니다. 살짝 웃는 사진보다는 무표정의 사진을, 컬러 사진보다는 흑백 사진을 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영국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80세 생일을 맞아 상하원 의원으로부터 자신의 초상화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영국 화가 그래햄 서덜랜드였습니다. 윈스턴 역시 그림을 즐겨 그렸기에 서덜랜드는 윈스턴의 작품 중 연못을 그린 그림이 인상적이라고 했습니다. 연못 뒤에서 윈스턴의 숨겨진 감정들을 볼 수 있었다며 말입니다. 그러자 윈스턴은 연못은 연못일 뿐이라며 이를 부정합니다. 이에 서덜랜드는 말합니다.
각하께서 피해가시는 거겠지요.
그것이 자화상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이유입니다…
모든 작품이 의도치 않게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윈스턴이 연못 그림으로 여러 차례 돌아가는 이유는 그의 자녀 마리골드 때문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일찍 죽음을 맞은 자녀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윈스턴은 자택에 연못을 만들고 끊임없이 연못을 그렸던 것입니다. 윈스턴은 그 사실을 숨기고 싶었지만 붓을 잡은 본인의 손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도 몰랐던, 회피하고 싶었던 사실을 서덜랜드는 정확하게 짚어냈던 것입니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언제나 주관적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의 주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화상은 그래서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 그것이 정확할 수도, 과장되어 있을 수도, 또는 과소평가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서덜랜드의 말처럼 자화상보다 다른 것들이 의도치 않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저는 일정 시간이 지나고 프로필을 다시 찍기로 계획했습니다. 하지만 이전에 생각했던 그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진을 찍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스스로 더 많은 것들을 그려보고, 그것이 제 모습에 흔적을 남길만한 시간적 여유를 조금 더 주고자 함일 것입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화상은 ‘스스로 그린 자기의 초상화’이지만, ‘스스로’와 ‘그린’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누군가가 찍어준 나의 사진에 내가 더 잘 드러날 수도 있으며, 붓이 아닌 음악이나 글, 또는 상상만으로도 나를 그릴 수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자화상을 그려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