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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빛시 Nov 09. 2018

아기 고구마의 미소

음식 동화 1 :: 고구마 미음

아기 고구마는 눈을 질끈 감았어요. 어두컴컴한 상자 속이 너무나도 무서웠거든요. 엄마가 계셨으면 폭 안아주셨을 텐데. 구겨진 신문지 뭉치 사이에 홀로 남은 아기 고구마. 그가 할 수 있는 건 눈을 감았다 뜨면서 작은 구멍 밖을 내다보는 것뿐이었지요. 그나마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요.  


태어나면서부터 거친 흙과 뒹굴며 땅 속에서 살아왔던 고구마. 그래서 어둠 속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었지요. 하지만 '읏차!'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우두두둑...' 언니 오빠 부모님과 잡고 있던 손을 놓친 채 환한 세상을 만났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장갑을 낀 사람들이 고구마 가족을 모조리 땅 밖으로 꺼내버렸지요. 이어서 그들은 커다란 아빠와 통통한 언니, 날씬한 엄마와 마른 오빠를 각기 다른 상자 속으로 넣었어요. 황톳빛 흙 위의 아기 고구마는 가족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요. 그때였어요.


"이건 너무 작은데."


손가락 두 개가 아기 고구마를 집어 올려 밭 너머로 던지려고 했어요.


"잠깐. 여기 조금 자리가 있어."


하마터면 혼자 고구마 밭에 남아 미아가 될 뻔했어요.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구조된 아기 고구마는 엄마 고구마 곁에서 잠이 들었지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요. 잠에 들었다가 다시 깨어나 보아도 고구마들의 주변에는 캄캄한 어둠뿐이었어요. 하지만 아기 고구마는 땅에서 나왔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 없었지요. 그는 조심스레 엄마에게 물어보았어요.


"그게... 뭐였어요?"


어둠 속에서도 엄마는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어요.


"네가 본 건 빛이란다."


"빛이요?"


"응. 그리고 우린 다른 세상으로 가는 중이야. 그게 우리의 운명이거든.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있으렴."


더이상 엄마는 입을 열지 않았어요. 수많은 덜컹거림과 일렁거림. 그 끝에서 아기 고구마는 이웃들과 함께 또다른 세상에 도착했어요. 네모난 하늘이 열렸고, 한 여자가 고구마들을 하나둘 꺼내 신문지 위에 늘어놓았지요. 그 위 있는 동안 아기 고구마는 새로운 빛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어요. 하늘보다는 훨씬 낮은 천장, 그 위에 달린 밝은 것들도 새로웠어요. 하지만 아기 고구마의 마음을 빼앗은 것은 아기. 다른 사람들보다 몸집도 훨씬 작고 달리 혼자 걷지도 못하는 모습이 마치 자신 같았거든요. 이틀 후 아주머니는 고구마들을 상자 속에 다시 집어 넣었어요. 처음과 달랐던 건 상자에 구멍 몇 개가 생긴 것과 고구마 틈 사이로 신문지들를 구겨 넣었다는 것.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상자 속 고구마들도 하나 둘 사라졌어요. 엄마 고구마도 꺼내졌어요. 떠나기 전 엄마는 아기 고구마에게 이런 말을 남겼어요.


"이게 우리의 할 일이란다. 곧 너도 다디단 몸이 되어 네 몫을 하게 될 거야."


그렇게 이웃들을 모조리 떠나 보낸 아기 고구마가 이젠 혼자 남게 된 것이었지요. 그런데 여자는 도무지 뚜껑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아기 고구마가 있다는 걸 잊은 걸까요? 더는 고구마를 먹지 않게 된 걸까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이를 어쩌지? 아기가 통 미음을 먹지 않네. 혹시..."


여자의 목소리였어요. 이어서 자박자박 소리가 났고 하늘이 열렸지요. 캄캄한 상자에 들어온 빛처럼, 환한 목소리 한 줄기도 들려왔어요.


"고맙게도 한 개 남아 있었구나."


아기 고구마가 여자의 손에 들렸어요. 상자는 착착 접혀서 문 밖으로 내보내졌고요. 곧이어 아기 고구마는 난생 처음으로 목욕이란 걸 했답니다. 옷에 묻은 흙이 물에 씻겨내려가자 검붉은 몸뚱이가 드러났어요. 아기 고구마는 자신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주는 아주머니를 물끄러미 올려다 보았어요. 아주머니가 그걸 안 걸까요?


"음. 오늘은 그냥 분유를 주고, 내일 만들어 줘야겠다."


조리대 위에 놓인 아기 고구마는 여자의 다양한 행동들을 보았어요. 음식을 먹는 것, 음악을 듣는 것, TV를 보는 것, 걸어다니는 것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것도요. 그런데 이러한 모든 행동을 하는 중에도 여자의 눈길과 손길은 아기에게 가 닿아 있었어요. 음악을 들을 때에도 아기가 좋아하는 걸 틀으려고 했고, 걸을 때에도 화장실에 갈 때에도 아기를 보살피며 행동을 했거든요. 물론 밥을 먹을 때에도요. 아기 고구마는 저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나도 저 작은 사람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면.'


다음 날이 밝았어요. 아기를 뒤로 업은 여자가 아기 고구마를 집어 들었어요. 싸악 싸악 벗겨지는 검붉은 옷. 고구마는 자신의 내면이 그렇게 하얀 줄은 그제야 처음 알게 되었어요. 놀라움도 잠시. 큰 칼이 다가와 아기 고구마의 몸을 뎅겅뎅겅 잘라버렸지요. 이윽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부글부글 끓는 뜨거운 물. 단단했던 몸이 말캉해지는 아픔을 느끼면서도 고구마는 생각했어요.


'우리의 할 일이란 게 무엇일까?'


이윽고 노랗게 익은 고구마가 보글보글 익어가는 흰 쌀가루물 위에 눕혀졌어요. 휙휙, 국자가 저어지며 쌀가루와 하나가 되어가는 아기 고구마. 이어서 여자는 그들을 체 위에 올렸어요. 노란색과 하얀색, 그 중간 어디쯤의 빛깔을 지닌 고구마 미음을 완성하기 위해서요. 여자는 '다 됐다'라는 말과 함께 마음을 그릇에 담았어요. 오전의 빛이 그릇 위를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지요.


"맘마 먹자."


작은 숟가락 하나가 그릇 안으로 들어왔어요. 고구마 미음의 일부가 된 아기 고구마는 깜짝 놀랐어요. 작은 사람, 그러니까 아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아기 고구마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어요.


'이게 내 일이라는 걸까?'


"아~ 하자."라는 말과 함께 미음은 작디 작은 입 속으로 들어갔어요. 꿀꺽. 아기는 빛나는 미소를 지었어요. 빛이 된 아기 고구마를 대신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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