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동화 2 :: 양배추 미음
말 그대로 천千의 얼굴입니다. 영화배우 양배추 씨 얘깁니다. 그를 감싸는 커다란 잎새부터 떼어 보도록 하지요. 정극 배우로서 그가 지닌 연기의 그릇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으니까요. 넓적한 잎이 통째로 찜솥에 들어가면 야들야들한 로맨스 영화를 찍을 수 있지요. 상대역은 대개 밥상의 히로인인 쌀밥이나 된장입니다. 그가 썩둑썩둑 썰린 후 고기와 함께 출연한 작품을 보셨나요? 맛으로 당신의 눈물을 쏙 빼놓았던 신파 영화도 양배추 씨의 대표작이거든요. 그뿐인가요? 아삭한 청춘 영화도 잘게 썰려 마요네즈에 버무려진 그가 출연했다 하면 대히트!
그의 작품을 접한 관객과 평론가들의 반응도 어마어마합니다. 며칠 묵었던 체증이 내려가서 화장실에서 자유를 느꼈다더거나, 위장까지 개운해졌다고들 하지요. 젖몸살이 온 수유부들 또한 그를 그렇게 애지중지 한다고요. 그런데 그렇게 다재다능한 양배추 씨에게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희고 맑은 외모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외모에 대한 그의 노력은 출생 직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뽀얀 살결을 유지하기 위해 거의 매일 농약 화장품을 꼼꼼히 발랐거든요. 그리 하지 않으면 벌레들의 공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지요. 게다가 연기를 하느라 잘린 단면을 냉장고에 방치하게 되면, 칼날이 닿은 부분에서 검버섯도 슬어요. 그래서 양배추 씨의 매니저는 연기를 마친 그에게 늘상 랩으로 감싸는 팩이나 신문지 안마를 해주곤 하지요.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그가 정복할 수 없는 장르가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아동극. 아동 식단 어느 곳에서도 그를 불러주지 않았거든요. 어쩌면 그의 전신 켜켜이 농약이 묻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양배추라고 하면 아삭함이 먼저 연상되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고요. 그러나 자꾸만 어린 관객들 앞에 서고 싶어 하는 그를 향해 매니저가 내뱉었어요.
"신파, 멜로, 정극, 로맨스. 그 정도면 됐지 뭘 그래? 어린 애들의 식탁에는 두부, 달걀처럼 여리여리하고 말랑말랑한 것들이나 오르는 거라고. 쓸데 없는 생각은 접어 두고 새로 들어온 대본이나 읽어보지? 이번에는 역사극이야. 제목은 '왕의 식탁'이고 자네는 수라상에 오르는 주인공을 맡..."
"히유우우. 됐네."
양배추 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어요.
"응? 안 하겠다고?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난 이제 벌 만큼 벌었어. 이젠 내가 하고 싶은 연기를 하고 싶어.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 되고 싶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양배추 씨는 문을 쾅 닫고 가버렸어요. 며칠 후 인터넷 신문의 연예 섹션에는 여러 기사가 올라왔어요.
'슈퍼스타 양배추, 행방불명!'
'매니저 몰래 홀연히 사라져'
'그의 부재로 영화계는 일대 혼란'
그 시각, 양배추 씨는 검은 마스크와 검은 모자를 착용한 채 깊은 산 속을 걷고 있었어요. 높이 올라갈수록 산에 사는 나무들의 키는 낮아졌죠. 나무들의 크기가 지상의 절반 가량 됐을 법한 곳이었어요. 양배추 씨가 걷고 있던 길 옆에 잎에 구멍이 뽕뽕 뚫린 노인이 앉아 있었지요. 우리의 대 배우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눈길을 보냈어요. 어딘가 모르게 그가 자신을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했고요.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배우를 향해, 넝마를 입은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어요.
"이제 왔는가."
양배추 씨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침묵으로 답했어요. 이 땅에는 자신을 모르는 존재가 없을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그는 속마음을 감춘 채 노인에게 말했어요.
"...싸인 해드릴까요?"
"예끼놈. 아이들은 니가 찌그린 볼펜 자국 따위에는 전혀 관심 없다."
노인의 반응에 깜짝 놀란 양배추 씨가 마스크를 벗었어요. 모자도 내려놓았고요. 그렇게 하면 자신을 알아보게 될까봐 말이죠.
"아이들을 위한 식단이 되고 싶으면 네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야지."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양배추 씨. 그를 내려다 보며 노인이 말을 이어 갔어요.
"우선 너에게 들러 붙은 지독한 화장품 냄새 먼저 떼어내거라. 그리고 네가 가진 가장 여리고 좋은 것을 꺼내."
말을 마친 노인은 흰 연기가 되어 스르르 사라졌어요.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구멍난 이파리 한 장만 놓여 있었고요. 때묻은 초록 넝마를 집어 든 양배추 씨는 직감했어요.
'배추... 할아버지..?'
산에서 내려오는 길. 그는 올라갈 때에는 보지 못했던 옹달샘 한 개를 발견했어요. 그곳에서 겹겹이 입고 있던 옷을 벗고 향수, 마사지 크림, 화장품에 찌든 몸을 정결하게 씻었지요. 물이 너무 차가워서 마음까지 씻기는 듯했어요. 샘물에 비친 자신에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던 양배추 씨는 가슴에 손을 넣었어요. 자신의 가장 깊고 여린 곳, 심장 가까운 그곳에는 여리디 여린 고갱이가 들어 있었지요.
석 달 후,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어요.
'양배추, 새 작품으로 컴백!'
'고갱이를 삶기고 믹서에 갈려 아기 미음으로 변신'
'흰죽과의 단출한 연기, 호평 일색'
역시 슈퍼스타는 슈퍼스타였어요. 이후 흰 쌀죽과 진짜 사랑에 빠진 양배추 씨는 전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고 도심 속 작은 집에서 호젓하게 살아가고 있답니다. 화장품은 꼭 필요할 때만 바르고요. 아내가 된 흰죽이 인공적인 것을 무척 싫어하거든요. 덕분에 겉 잎에는 구멍이 뽕뽕 나고 있지만, 그런 자신을 발견한 양배추 씨는 씩 웃고 말아요. 배추 할아버지 같은 대배우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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