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동화 3 :: 배숙
"네까짓 게 의사라고?"
로얄층에 사는 알약이 빈정거렸어요. 지하 2층, 지상 4층으로 되어 있는 냉장고 아파트. 그중 꼭대기에서 바로 아래층에는 아주 특별한 이들이 살고 있어요. 바로 약들. 알약, 가루약, 물약, 바르는 약, 붙이는 약 등 종류도 다양했지요. 그들은 사람의 시선이 가장 잘 닿는 3층, 그 중에서도 '약방'이라는 특별한 방 안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있었어요. 약들의 임무는 콧물, 가래, 몸살 같은 감기는 물론 치통, 근육통, 생리통, 속쓰림 심지어는 가려움 같은 아픔들까지 치료하는 것. 따라서 그들은 다른 주민들의 우러름을 받고 있었지요. 외강내유로 유명한 달걀 선생조차 '우리는 늘 3층에 사는 분들의 공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아프지 않아야 우리가 이곳에서 썩어버리지 않고 생을 마감할 수 있거든요.'라고 했고요.
그러던 어느 겨울날. '콜록 콜록' 기침 소리와 함께 냉장고 아파트의 문이 열렸어요. 3층의 약방 문이 열린 후 무언가가 밖으로 꺼내졌고요. 해결사로 알려진 종합감기약이었어요. 투툭, 거드름을 피며 사람의 손바닥 위에 떨어진 알약을 향해 주민들이 선망의 눈길을 보냈어요. 감기약은 거드름을 피우며 꿀꺽 삼켜졌고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평소에는 한두 번 정도면 사람을 낫게 하던 약들이 계속 차출되어 나갔거든요. 더 큰 문제는 약들의 줄어드는 동안 다른 식재료나 반찬들은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자 냉장고 주민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큰 병에라도 걸렸나?"
"어쩌면 약들이 힘을 다 한 건지도 몰라."
아파트 전층을 자욱하게 채우던 목소리의 방향은 자연스레 달걀 선생을 향했어요. 좁고 둥근 어깨를 한 번 으쓱 한 선생은 입을 열었어요.
"사람의 입맛이 돌지 않는다면 우리도 여기에서 썩을 수밖에 없을 텐데, 큰일이군요. 약이시여, 얼른 사람을 치료해주소서. 우리 모두 약 기운이 제대로 돌기를 기도합시다. 로얄층에 계신 우리 약님들이시어, 부디.."
그때였어요.
"우리도 감기를 고칠 수 있어요!"
기도 소리가 끊어졌어요. 모두의 눈길은 목소리가 나온 쪽을 향했지요. 그곳은 약들이 모여 있는 3층이 아닌 지하, 심지어 지하 2층이었지요.
"누구냐? 지하방에 사는 주제에."
로얄층의 창문이 빼꼼 열리더니 둥근 알약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어요. 그러자 저 아래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새어나왔어요. 모래 빛 얼굴을 한 엄마 배였지요.
"죄송해요. 애가 아직 어려서. 얘야, 어서 죄송하다고 사과 드리렴."
"아니예요 엄마. 예전에 나무에 매달려 있을 때 태양 선생님이 그러셨어요. 우리 모두는 남을 돕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요."
아기 배가 처음보다 더 크게 말했어요. 하지만 냉장고 마을 주민들은 웃어 넘기고 말았어요. '아직 어려서 철이 없군. 전지전능한 약님이 아니면 누가 사람을 낫게 한단 말인가?'라면서 말이죠. 약통 속의 약들 역시 '니까짓 게 의사라고?'라면서 아기 배의 말을 흘려 버렸지요. 하지만 이 작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주민들도 몇몇 있었어요.
그날 밤이었어요. 사람의 기침 소리가 더욱 높아졌어요. 평소에는 냉장고의 웅얼거림 때문에 들리지 않던 것이었는데 말이죠. 콜록거리는 소리 사이로 누군가가 아기 배에게 다가왔어요.
"오늘 낮에는 정말 용감했단다 얘야."
원통 유리병에 담긴 꿀 할아버지였어요. 옆에는 검붉은 대추 할머니도 있었고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된 꿀 할아버지의 뚜껑 모자와 병 사이에는 꿀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어요. 할머니 역시 냉장고에 들어오기 전보다 더 쭈글쭈글해져 있었고요.
"네 말대로 너는 남을 돕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거야. 우리가 도와주마."
그날 새벽, 냉장고 아파트의 문이 빼꼼 열렸어요. 밤을 새며 때를 기다리던 아기 배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그머니 탈출을 시도했지요. 그때였어요.
"그 애는 너무 작고 어려요. 제가 해보겠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가 들렸어요. 냉장고 주민들 중 이걸 들은 건 아기 배와 엄마 배뿐. 보글거리는 소리는 해가 떠오를 때까지 이어졌어요.
"자, 오늘은 입맛이 돌아왔으니 뭘 좀 먹어볼까?"
약만 들락날락하기에 바빴던 냉장고 아파트 문이 활짝 열렸어요. 그것도 꽤 여러 번이나요. 조용히 썩어가던 양배추, 토마토는 물론 언제까지나 마을을 지킬 것 같던 냉동 식품들과 장조림들도 밖으로 꺼내졌어요. 사람이 감기를 앓던 동안 비어있던 식탁. 그 위에 냉장고 주민들이 오랜만에 자리를 잡게 되었지요. 주민들은 모두 기쁨의 샘에 빠졌어요.
"썩기 전에 탈출 할 수 있게 되었어! 만세!"
"약이 제 임무를 다 한 게 틀림 없어."
"그런데 저건 무엇일까요?"
달걀 선생이 가리킨 곳에는 황금빛 달덩이 하나가 누워 있었어요. 속이 모두 파헤쳐진 그는 쌕쌕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지요. 그 안에는 액체가 아주 얕게 채워져 있었고, 얇게 저며진 채 퉁퉁 불어 있는 대추 할머니가 동동 떠 있었지요. 이제는 바닥을 모조리 드러낸 꿀 할아버지도 그 옆에 잠들어 있었어요.
"글쎄.. 처음 보는 거라 잘 모르겠네."
'후루룩'. 사람이 요리책을 읽으며 배숙을 들이켰어요. 냉장고 주민들이 식탁 위에 놓인 달덩이의 정체에 대해 논의하는 사이, 아파트의 지하, 그것도 지하 2층에 사는 엄마 배와 아기 배만이 아버지와 노인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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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집의 불문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