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덤을 내가 팠다. 임기가 끝나기 한두 달 전에는 다들 조용히 정리하면서 마무리한다고 하는데, 난 이곳을 떠나기 전날까지도 이 닭장 짓기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꿈에도 닭들이 나와 나를 쫓아다닌다.
프로젝트 비용 외에도 활동물품 지원비로 월 약 100달러, 연간 1000달러를 지원받는다. 보통은 사무용품을 사기도 하고, 프린터 같은 사무기기를 사기도 한다. 매년 같은 시기에 지원을 받다 보니 임기 마지막 해에는 끝나기 4~5개월 전 정도에 지원금이 입금되었다. 딱히 나는 필요한 사무용품이 없어 뭘 사서 시청에 지원을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A4용지 몇 박스, 프린터 잉크 몇 세트 등등을 사서 지원하면 될 일이었다. 사실 더 쉽게는 이 지원금을 그대로 쓰지 않고 반납해도 아무 문제없었다.
닭장 짓기는 몇 달 전부터 장애인과 직원이 여러 번 제안하던 거였다. 장애인가족 공동체가 함께 운영하여 이윤을 창출할 닭장이 하나 있었으면 한다고 이야기했지만, 시립도서관 건립 프로젝트로 정신이 없어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더 이상 지원받을 수 있는 프로젝트 지원금도 없었다. 도서관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어 여유가 생겼고, 아직 임기가 끝나기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한 번 해봐도 될 것 같았다. 사무소에 전화해서 활동 지원금으로 닭과 건축자재를 좀 사고 싶다고 했다. 지금껏 누구도 활동물품 지원금으로 그런 것을 산 적은 없다고 했지만, 아마존에서 사무용품보다야 닭이 훨씬 활동물품으로 적합하지 않겠냐며 설득해서 허락을 받아냈다.
코워커에게 닭장 한 개를 짓는데 얼마 정도 필요할 것 같냐고 물었다. 닭을 30~40마리쯤 구입하고 그 정도 닭이 들어갈 만한 것으로 예산을 짜보라고 하니 500달러면 될 거 같다고 했다. 500달러? 토종닭 한 마리가 얼마냐 했더니 10달러 정도라고 한다. 그럼 닭장을 짓는데 100~200달러면 된다고? 좀 의아스러웠지만, 동네 주민들이 일할 것이라 인건비는 들지 않을 것이고, 대부분의 자재들은 옛날에 동네 어귀에 교량 공사하고 남은 폐자재를 사용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닭장 하나가 500달러이면, 한 개는 더 지을 수 있다. 예전에 방문했던 어느 아마존 부족 학교 선생님께서 우리 학생들에게 학교를 졸업하고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닭 사육법 같은 것을 가르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신 말이 기억났다. 선생님께 연락할 방법은 다시 찾아뵙는 수밖에 없었다. 시청 차를 빌려 급히 부족 마을로 찾아갔다. 차가 마을로 들어가자 마을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반갑게 인사하며 손짓 발짓으로 학교 선생님을 불러 달라고 했다. 잠시 후 아이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왔다.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할 수 있는 선생님이다. 선생님께 닭장 짓기 프로젝트를 설명하자, 선생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셨다.
학교의 종을 치자 학교로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해가 어둑해져서 앞이 잘 보이지도 않을 때까지 마을 주민들이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회의를 하더니 설계도 하나를 내게 보여줬다. 언제까지 이렇게 닭장을 만들어놓을 테니, 비를 막을 수 있는 천장 천막과 닭만 지원해달라고 했다. 닭장 만드는 게 마을의 숙원 사업이었는데 이렇게 이룰 수 있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이미 깜깜해져서 마을 사람들의 미소가 보이지도 않는데 그들의 행복함이 내게 전해졌다.
아마존 부족 마을은 마을에서 닭장을 만들 자재를 구할 수 있었지만, 장애인 가족 공동체는 건축자재를 구해와야 했다. 동네 어귀에 교량 공사하고 남은 폐자재를 사용하면 된다고 했던 직원은 나에게 목재를 우리가 직접 옮겨와야 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었다. 이 마을에 차라고는 시청에 있는 차가 다인데, 우리 시청은 트럭이 없다. 그 말인 즉, 승용차 천장에 목재를 올리고 잘 묶어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처음엔 같이 목재를 들고 올려줄 직원들을 태우고 갔지만, 목재를 올리고 사람들을 태우니 이 놈의 고물차가 움직이질 못한다. 결국은 나와 한 명만 더 태우고 가서 낑낑대며 목재를 올리고 묶어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했다. 처음엔 긴 목재를 싣고 운전을 하려니 겁이 나서 시속 20km 정도로 운전했는데, 나중엔 익숙해져서 쌩쌩 달렸다. 한국에서 이렇게 운전하면 바로 잡혀갈 텐데 하며 낄낄대며...
목재를 실어 나를 때만 해도, 이것만 끝나면 다 끝났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에게 상상치도 못할 더 큰 산이 있었다.
“우리 이제 닭은 어디에서 사면되는 거야?”
나는 정말 닭농장이 있을 줄 알았다. 농장에서 닭 70마리를 사서 값을 치르고 닭들을 어떻게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다. 3년간 이곳에 살며 닭 농장을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어디엔가는 있을 줄 알았다. 토종닭을 키우는 집에 찾아가서 닭을 한 마리 한 마리씩 사야 한다고 미리 말해줬다면 난 정말 이 일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놀랍게도 닭도 낯선 이가 오고 주인이 낯설게 행동하는 것을 눈치챈다. 평소에는 주인을 따라도 낯선 이가 방문하면 절대로 잡히지 않는다. 담장도 없는 집에서 닭과의 추격전을 벌인다. 처음엔 닭들이 푸덕거리며 나에게 다가오면 얼음이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나중엔 나에게 다가오는 닭을 내가 잡아채게 되었다. 닭을 그렇게 맨 손으로 잡고 온 몸에 닭 냄새를 풍기며 집에 오면 도대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었다. 임기 마지막, 사무실에 앉아 쉬엄쉬엄 결과보고서와 인수인계서나 쓰면 되었을 것을, 내 무덤을 내가 팠다.
양쪽 마을에 닭장이 만들어지고, 한 마리 한 마리씩 닭을 사서 넣었다. 아마존 마을에서는 닭장 개장식으로 마을 운동회를 했다. 마을 주민들이 신나 하시는 것을 보니 고생했던 것은 또 싹 잊혀졌다. 학생들에게 닭 사육법을 잘 가르쳐줘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닭들이 낳는 달걀을 먹으며 학생들의 영양개선만 되어도 좋겠다 싶었다.
장애인가족공동체에서는 시장, 시의원, 지역구 대표들을 모시고 공식적으로 닭장 개장식을 진행했다. 손수 닭장을 지었던 장애인가족들도, 닭과 목재를 실어 날랐던 시청 장애인과 직원들과 나도 정말 고생하긴 했지만, 이렇게 높은 사람 불러 개장식을 할 정도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장애인가족들이 모두 초대하길 원했고 개장식 그들 앞에서 장애인 공동체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지역 대표도, 시장도, 볼리비아 대통령도, 그 누구도 우리에게 관심 갖지 않았는데, 볼리비아 사람도 아닌 Winnie가 우리에게 이렇게 관심을 가져줘 이렇게 닭장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피곤과 스트레스가 모두 날아갔다. 이곳에 와서 더 대규모의 프로젝트도 했었고, 또 많은 칭찬과 격려도 받았지만, 지금까지의 어느 칭찬보다도 고마웠고 뭉클했다.
내가 없어도 닭들이 아프지 말고 무럭무럭 컸으면 좋겠다. 달걀도 쑥쑥 낳고, 잘 부화되어 병아리들도 잘 크길, 그래서 학생들도 달걀을 먹고 쑥쑥 자라고, 닭 키우는 법도 잘 배우길, 장애인 가정에게도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