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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러기 Mar 11. 2021

컨○션

숙취해소음료

일을 잠시 쉬고 있는 중 야학에서 한글반 교사를 맡았다. 한글반 선생님께서 사정이 있어 그만두시게 되었는데 새로운 선생님을 아직 찾지 못해 급하게 새로운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한 달 정도만 한글반 수업을 맡아달라고 했다.   
야(夜)학이지만 한글반 학생분들은 대부분 연세가 많으시고 일을 하시지 않는 터라 아침 9시에 수업이 이루어졌다. 수학교사인 내가 한글을 잘 가르칠 수 있을 지도 걱정이었지만 워낙 아침잠이 많아 9시 출근도 힘들어하는 내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한글반 수업 첫날, 지난밤 저녁 수업을 함께 한 야학 교사들과 밤새 술을 마셨다. 9시 야학 수업을 위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고 지각을 하거나 수업에 소홀히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지난밤 술을 많이 마셨던 것이 티가 났다 보다. 쉬는 시간에 교탁 위에 컨○션이 하나 놓여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술약속이 자꾸 잡혔다. 일을 쉬고 있다 보니 밥 사주겠다, 술 사주겠다 보자는 사람들이 많았고, 백수라서, 삶에 대한 고민이 많아서, 술자리는 언제나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술을 마시고 다음날 수업에 가면 어김없이 교탁 위에 컨○션이 놓여 있었다. 지난밤 마신 술이 이렇게 티가 나는 건가? 동료 교사에게 나에게 술냄새가 나냐고도 묻고 혹시 옷매무시가 흐트러졌냐고도 물었지만 다들 괜찮다고, 어제 술 마신 거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70-80년 인생을 살아오신 우리 학생분들에게는 꿰뚫어 보는 눈이 있나 보다.  늦깎이 학생들에게 밤새 술을 마시고 온 어린 교사가 얼마나 철이 없어 보일런지 걱정이 되었다.

ㄱ과 ㄴ이 헷갈리고 자음 앞에 모음을 쓰시기도 하고 오늘 배운 것을 내일이 되면 다 잊어버리시기도 했지만, 학생분들은 매 수업시간에 최선을 다하셨다. “나 한글 다 배우면 며느리에게 고맙다고 편지 쓸 거예요.” “ 길 가다가 간판에 내가 아는 글자들이 있어 너무 행복해요.” 학생들의 열정 앞에 매번 술 마시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내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학생들의 열정 앞에 부끄럽지 않은 교사가 되자 다짐하고 한글반 수업을 마칠 때까지만이라도 술을 마시지 않기로 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수업에 들어갔는데도 교탁에는 계속 컨○션이 놓여 있었다. 처음 한 두 번은 내가 매일 술을 마시고 온다는 걸 아는 학생분이 으레 술을 마시고 왔겠거니 하고 놓아두시는 줄 알았지만 술을 마시지 않고 오는 날이 계속되어도 교탁에 늘 컨○션이 놓여 있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숙취해소음료를 계속 마실 수도 없고, 사실 이젠 술 마시지 않는다는 것도 말해드리고 싶어서, 수업이 끝날 때 정말 감사하게 잘 마시고 있다며 누가 이렇게 매일 음료를 가져다주시는지 살짝 여쭤봤다. 맨 끝에 앉아있는 학생분이 수줍게 손을 드셨다.

쉬는 시간에 학생분을 살짝 불렀다. “너무너무 감사한데, 저 이제 술 안 마셔요.”라고 말씀드리자 학생분께서는 “어머, 우리 젊은 처자 선생님이 술도 마실 줄 아나 봐요.”라고 하며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셨다.

“아니, 매일 컨○션을 주셔서요.”
학생분이 엄청 놀라며 “제가 맨날 사 온 것이 컨○션이에요? 그 술 마신 다음날 마시는. 티브이에 광고 나오는 그거?”라고 반문하셨다.
     
“난 편의점에 갔는데, 이게 제일 비싸가지고, 그래서 제일 좋은 음료수인가 보다 해서 매일 사 온 건데, 오매, 내가 우리 선생님을 술꾼으로 만들어 버렸네, 미안해서 어짤까. 내가 배움이 짧아서 오매 어짤까”

그러고 보니 아직 우리 반 아직 ㅋ까지 배우질 못했다. 무안해하시는 학생분께 괜찮다고, 제가 더 열심히 가르쳐 드리겠다고 이야기했다.
더 열심히 가르치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이곳에서 난 사실,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많은 교사임을 다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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