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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러기 Mar 12. 2021

오두막에서의 하룻밤 Ⅱ

아이티 여행 이야기

집주인을 보내고 집 밖으로 나가 보았다. 좁은 길들이 미로처럼 펼쳐져 있다. 도저히 이 길 사이에 들어섰다가 다시 집을 찾아올 엄두가 안 난다. 이미 집 안은 불 없이는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워졌다.   

     

촛불을 켠다.  좋은 분위기나 좋은 향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불을 밝히기 위함의 용도로 촛불을 사용하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더 깜깜해지기 전에 씻어야겠다. 그러고 보니 화장실이 어디지? 내가 화장실이라고 생각했던 문은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물건을 쌓아둔 곳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파티션 뒤로 화장실이 나타났다. 화장“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방과 화장실은 파티션 하나로 구별이 되어 있었다. 화장실엔 수도꼭지가 없고 샤워꼭지 위에 큰 물통이 하나 달려 있다. 문득 올라오던 길 우물가에서 줄을 서서 물을 긷고 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저 아래 우물가에서 무슨 수로 이 물을 여기까지 가져와서 저 물통에 물은 어떤 방법으로 넣는 것일까?


화장실 한편엔 도저히 이 곳과 어울리지 않는 눈부시게 새하얀 변기가 놓여있다. 분명 이 변기는 2개월 전 이 집에 새로 만들어진 것일 것이다. 수도가 없는 곳에 수세식 변기라니... 그러고 보니 집주인이 나가면서 “미안한데, 화장실 물은 모아서 한 번에 내려줘.”라고 했었다. 그때는 물 절약을 부탁하는 정도로만 생각해 흘려들었는데, 이 변기의 물은 사람이 변기 수조에 물을 넣어 내려야 하는 수동식 변기이니, 한 번 물을 사용하면 다시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저 물통에 있는 물을 내가 다 써도 되는 것일까? 저 물을 샤워와 화장실 중 어느 곳에 사용하는 것이 유용할까? 나는 오늘 밤 화장실을 몇 번이나 가게 될까? 긴 여행으로 앓고 있는 만성 변비가 오늘처럼 감사할 때가 없다.      


사랑을 쫓아 여기까지 왔지만 20대 젊은 미국 여성에게 화장실은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고,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는 그녀를 집 밖에서 씻고 공중화장실을 다니게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는 방 한편에 하수구를 만들고 변기를 들이고 물통을 천장에 매달고 샤워꼭지를 달아 그녀가 미국식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변기만큼이나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미국 브랜드의 샴푸, 린스, 바디클랜져, 바디로션 등이 가득한 이 공간이 그들의 거리와 사랑을 모두 보여주는 공간으로 느껴졌다.       


테이블에 앉았다. 촛불 아래서 집주인이 주고 간 아이티 관련 책들을 뒤적여 봤지만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갑자기 “끼익” 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분명 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는데,,, 문으로 다가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없다. 다시 소리는 나의 옆에서 들린다. 뭐지? 언덕에 위치한 파란 오두막엔 그 여자와 남자만 사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화장실일 것이라고 짐작했던 문 뒤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얇은 판자로 나누어진 두 방에선 모든 소리가 공유되었다. 마치 한 공간에서 나는 소리인 듯하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움직이는 소리,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는 소리.. 옆방 사람도 나의 낯선 소리에 멈칫했을 것이다. 켜놓았던 핸드폰의 음악을 끈다.      


모르겠다. 도저히 책은 읽히지 않고, 사놓았던 맥주도 화장실 걱정에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잠이나 자야겠다. 침대에선 여자에게서 났던 좋은 향이 난다. 2인용 침대, 2개의 베개, 그러고 보니 여기 컵도 2개였고, 화장실의 칫솔도 2개였는데,,, 여긴 커플의 집이었음이 분명한데, 오늘 이 커플은 어디에서 자는 걸까?     


푸드덕, 뭔가 날고 있는 소리가 난다. 옆방 소리인가? 푸드덕, 뭔가 이불에 부딪혔다. 푸드덕, 이건 옆방 소리가 아니다. 급히 핸드폰 손전등을 켜니, 제발.. 나의 악몽은 여기서 끝이길 바랐는데,, 눈앞에 엄지손가락 두 개보다도 큰 바퀴벌레가 날고 있다. 갑자기 손전등을 비춰 놀라서인지 바퀴벌레는 미친 듯이 온 방을 부딪치며 날고 있다.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 손전등을 끄고 누웠지만 바퀴벌레는 날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내 귀는 바퀴벌레의 위치를 그대로 쫓고 있다. 탁! 바퀴벌레가 침대에 떨어졌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난 그대로 침대에서 뛰쳐나왔다. 내가 움직이니 다시 바퀴벌레가 날기 시작한다.

     

이렇게는 잘 수 없다. 바퀴벌레를 잡아야 한다. 나는 잡을 수 없다. 사람을 불러오자. 이 밤에 사람을 집 안에 들이는 것과 바퀴벌레와 함께 자는 것 중 무엇이 더 위험한가? 아니 무엇이 더 싫은가? 바퀴벌레가 더 싫다.     

집 밖으로 나왔다. 밖은 생각보다 덜 깜깜했다. 달이 떴고, 아.. 그리고 아랫동네는 전기가 들어온다. 정전은 이 산동네만의 문제였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인지 길에서 자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 가장 어려 보이는 아이를 깨운다. 자고 있는 모습은 귀여운 소년이었는데 깨워 일으켜 보니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크다.      


“정말 미안한데, 내 방에 정말 큰 바퀴벌레가 있어. 잡아줘.”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대체 이 말은 바디랭귀지로도 표현이 안 된다. 소년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집을 가리켰다. 자다 깬 소년은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지만 난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집으로 데리고 갔다. 소년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 손전등으로 바퀴벌레를 찾았다. 바퀴벌레는 화장실 파티션에 붙어 있었다. 바퀴벌레를 가리키자 소년이 무심하게 슬리퍼로 바퀴벌레로 내리쳤다. 어둠 속에서 화장지를 찾고 있는데 소년은 바퀴벌레를 손가락으로 잡아서는 문 밖으로 내던지고는 인사도 없이 밖으로 나갔다.     


소년이 나가고 문이 잠겼는지 이중삼중으로 확인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여전히 이불에서 좋은 향기가 난다. 그리고는 정말 까무룩 잠이 들었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니 온 세상이 밝다. 아직 체크아웃 시간은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집주인 커플이 벌써 왔다. 문을 열자, “너 어제 앞집 애에게 바퀴벌레를 잡아달라고 했다며?” 하며 웃으며 커플이 들어온다. 푸석한 얼굴을 보니 이 커플들은 밖에서 밤을 새웠나 보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이미 온 동네 사람이 다 알 걸’이라며 웃는다.     


체크아웃 시간은 한참 남았는데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집주인 커플을 얼른 재워야 할 것 같고 난 이 아침이라도 아이티를 좀 봐야겠다.        

“공항 가는 길은 알아?”라고 집주인이 묻자 난 그냥 이 길 끝까지 내려가서 택시 타면 될 것 같은데 라고 대답한다. 밝은 햇살 아래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으며 활기찼다. 미로 같은 길이지만 결국 계속 내려가면 큰 길이 나올 것이다. 내려가면서 사람 사는 구경 좀 해야겠다.

      

아이티에서의 마지막 밤은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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