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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나 Jun 08. 2020

회의록을 쓰는 사람, 가장 많이 듣는 사람.

TBWA의 장편 회의록, <우리 회의나 할까?>를 읽고.

사실 일을 한다는 건 회의를 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혼자하는 가내수공업이 아닌 이상 회의 없이는 아이디어를 얻기도, 역할을 나누어 일을 진행시키기도, 맥락을 공유하고 받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출근을 하는 것처럼 익숙하게 회의실에 들어간다. 그리고 회의를 하며 매번 깨닫는다. 아. 아까 혼자 끙끙 안고 있지 말걸. 얼른 회의나 할걸.  


<우리 회의나 할까?> 는 TBWA의 김민철 카피라이터가 회의라는 매개체를 이용해 대표적인 캠페인의 제작과정을 담아낸 책이다. 많이 알려진 대로 TBWA는 국내 가장 유명한 광고대행사 중 하나다. SK텔레콤의 '생활의 중심' , 대림 e 편한 세상의 '진심이 짓는다.' 등 책에 실린 캠페인들은 당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쉽게 지나치지 못할 광고들이었다.


이런 대단한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박진감이 넘치기에 읽는 사람도 재미가 난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쯤이 되면 결국 작품을 만들었던 주인공들의 맹목적인 종교에 주목하게 된다. '회의교'라는 종교.


회의만큼 기적적인 순간은 없다는 것 _ 프롤로그 중



책에 담긴 많은 내용은 회의가 없었다면 모든 광고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회의의 중요성을 뒷받침한다. 위대한 회의를 만들기 위한 약속, 막다른 벽을 만난 것 같았을 때마다 회의를 열쇠로 풀어갔던 에피소드. 그 증거로 남아있는 빠짐없는 회의록 원본들.


즉, 회의가 일의 수단을 넘어, 아이디어의 화학작용을 만들어내는 성스러운 의식으로 눈 앞에서 펼쳐지는 셈이다.


하지만 나는 회의의 위대함보다 김민철 카피라이터에게 생각이 꽂혔다. 회의록을 쓴다는 것. 그는 어떤 생각으로 회의록을 쓰는 일을 맡았을까. 그것도 자신의 소명이라고 느낄 만큼 꾸준히. 기록의 결과보다는 기록하는 사람에게 맘을 뺏긴 것이다.


가볍게 생각해보면 회의록을 쓰는 사람은 자연스레 관찰자가 되기 쉽다. 주요 발언자가 아닐수록, 팀에서 막내일수록 회의록을 적는 역할을 맡는 건 우연이 아니다. 회의록을 쓴다는 건 계속 들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잘하기는 더 어렵다. 기계처럼 다 받아 적는 게 답이 아니니까.


회의 참여자들의 끝없는 티키타카 속에 핵심 키워드를 뽑아낼 줄 알아야 하고, 흐름 속에서 신호 없이 화제가 전환되면 다른 bullet point로 신속하게 뺄 줄도 알아야 한다. 흐름이 맞지 않게 가고 있다면 전체 그림을 보고 있는 회의 기록자가 가장 먼저 포착해 제지도 할 수 있다. 결국 가장 잘 들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김민철 카피라이터는 입사 후 광고에는 아는 게 없어 회의 시간에 열심히 필기하고 정리해 받은 첫 칭찬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게 꾸준히 쓰게 하는 힘이었다고. 그가 말했듯 회의록이 성장한 만큼 경청의 자양분은 고스란히 자신의 성장으로 되돌아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회의록을 쓰는 동안 나는 성장했고, 회의록도 성장했다. _ 프롤로그 중


자연스레 '요즘 내가 회의록을 적었던 횟수가 몇 번인가'를 떠올려보게 됐다.


만약 발언권에 큰 욕심이 없는 회의라면 회의록 쓰기를 자발적으로 하게 된다. 반면 내가 주장해야 할 어젠다나 과제가 확실할수록, 혹은 아이디어를 더 많이 내야 하는 회의일수록 화자 역할에 더 충실해왔다. 분명 개인적 특성도 있을 것이다. 말을 하며 생각을 정리해 나가는 탓에 우선 쏟아내는 것에 집중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주장에 초점을 맞춘 역할로 회의를 하거나, 주요 발언자가 아닌데 회의록을 쓰고 있지 않다면 경청하고 있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전자로는 의견 교환 속에서 포착되는 근거를 기억하고 내 생각을 정리하며 발언 기회를 기다리느라 충분히 상대의 의견을 듣지 못할 때가 있을 것이고. 후자는 긴 시간 회의일수록 듣기만 한다면 집중력이 안드로메다로 가기 쉽다.


따라서 가장 경청하고 있는 사람은 지금 회의록을 쓰는 그일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회의가 끝난 후 정리까지 하는 이라면 각 어젠다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나는 회의를 얼마나 기록하고 있을까. 회의를 얼마나 듣고 있을까.

그게 마음에 남았다.



나는 다만 충실한 기록자일 뿐이다. 다만 그뿐이다. _ 프롤로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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