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랬어”라고 따져 묻지 못한 마음
나의 분노를 찾아가는 여정 속에 기억의 오류가 있었다. 성인이 되기 이전의 어린 마음은 그저 마냥 순수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착각이었다. 계속 들여다보면 볼수록 ‘화‘라는 감정은 잠깐 왔다가 금세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달콤한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한 장 한 장 쌓여 별다른 일이 없을 때도 불쑥불쑥 생각나는 존재였다.
열세 살, 이사를 가기 직전 6학년 1학기를 한창 보내던 중이었다. 나는 걸스카우트이었다. 동그란 빵모자를 옆으로 비스듬히 쓰고 같은 갈색 계열의 원피스를 입고 반타이즈까지 신으면 나는 마치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우쭐함을 느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누군가를 도와줄 때도 부끄러움 대신 당당함이 앞섰고 자신감이 넘쳤다. 그래서 걸스카우트 모임이 있는 날은 반드시 그 옷을 차려입고 갔다. 그때는 유독 자주 그 옷을 입은 날이 많았던 거 같다. 걸스카우트의 추억을 남긴 사진 역시 6학년 때가 제일 많았다. 사진 속에서는 나와 함께 유독 자주 보이는 친구 둘이 있었다. 한 명은 단발머리가 잘 어울렸던 친구 지민이었고 또 한 명은 우리 집 위층에 살던 긴 생머리의 지혜였다. 우리 셋은 자주 어울려 다녔다. 특히 집이 가까운 지혜와 더 자주 놀았고 지민이는 과외를 같이 했었다. 지민이의 이모가 한자를 가르치셨는데 작은 방에서 같이 ‘하늘 천, 땅 지’ 하면서 천자문을 소리 내어 외웠던 기억이 난다.
지민이와 지혜는 둘 다 꽤 영리했지만 지민이는 질투심이 많고 좀 더 새침한 느낌의 고집 센 아이였다. 그에 반해 지혜는 부모님께서 자영업을 하셔서 남동생과 둘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동생을 잘 챙기는 자상한 누나이자 차분한 느낌의 아이였다. 그래서 친구지만 언니같이 나를 잘 챙겨주기도 했다. 나는 우리 셋이 꽤 잘 어울리는 삼총사라고 생각했다. 고무줄놀이도 셋이 있으면 할 수 있었고 공기놀이나 공놀이도 셋이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또 무엇보다 우리는 걸스카우트였다. 같은 학교, 가까운 집, 걸스카우트, 이 세 가지 공통점은 하루 종일 우리를 함께 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집 가까운 게 최고였는지 나는 우리 집 위층에 살았던 지혜와 좀 더 친밀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수많은 감정들이 내 안에서 토네이도처럼 휘몰아쳤고 처음으로 ’ 배신감‘이란 감정도 느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학교 수업이 없는 날이었고 특별한 행사가 있지 않는 이상 걸스카우트 모임도 주말에는 진행하지 않았다. 나는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까지 차려입고 그것도 혼자 갈 생각을 했다는 게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어쨌든 나는 그녀들의 거짓말에 속았다. 우연히 지민이와 지혜가 골목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는 내게 지민이가 말했다.
“오늘 걸스카웃 모임 있잖아. 몰랐어?”
나는 당연히 너희는 안 가냐고 물었고 지민이는 이따 갈 거라고만 했다. 그때까지 지혜는 아무 말 없이 그냥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왜 그랬는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아마도 옷을 빨리 갈아입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나 보다. 왜 같이 갈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집으로 후딱 뛰어가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스카우트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학교를 갔다. 당연히 운동장까지 텅텅 비어있었고 나는 혹시나 해서 학교 건물까지 들어갔다 나왔다. 그때의 감정은 뭐라 표현하기가 어렵다. 정말 수많은 감정들이 순간적으로 밀려왔던 거 같다. 당연히 화도 났다. 그런데 그 많은 감정들 중에 이상하게 내 속을 울렁이게 만드는 감정이 있었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느낌이 느껴진다. 꽤 충격이었던 거 같다. 지금도 딱 어떤 단어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만 그 감정이 그녀들에게 “나한테 왜 그랬어? “라고 따져 묻지 못하게 했었다. 그때 우리는 고작 열세 살이었다.
지민이와는 이사 간 이후로 절대 연락하지 않았다. 핸드폰도 없는 때였거니와 그녀와는 남은 평생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지혜와는 몇 년 동안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서서히 멀어져 갔다. 좋은 추억들도 많았지만 자다가 이불 킥하게 만드는 기억이 있다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기억 중에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