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를 찌르는 보험사의 한마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셔야죠.

by winsomei

나는 새로운 시작을 언제나 환영한다. 작은 취미 생활이라던가 새로운 모임이라던가 어떤 것이든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내게 즐거움과 기대감을 갖게 해 주어 삶의 원동력이 되어 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늘 바빴던 건 비록 작심삼일이 될지라도 항상 새로운 무언가 일을 계속 벌려서였다. 특히 그것들을 하기 위한 계획 세우는 일을 좋아하는데, 그 계획 세우는 일에 들이는 시간과 공이 상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끝까지 해내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계속했다. 삼일을 하고 그만두게 되면 잊어버리고 있다가 며칠 뒤 혹은 몇 달 뒤 다시 했고 어떤 것들은 결국 마무리를 짓기도 했다. 나는 굉장히 느리고 게으르게 가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포기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직장에서 일하는 최소 8시간 외에 밖에서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지하철이었다. 왕복 3시간 거리의 직장을 다니면서 지하철에서 특별한 일은 거의 없었다. 늘 그렇듯 매일 똑같이 출근길에는 3호선에서 6호선으로, 퇴근길에는 6호선에서 3호선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야 할 곳으로 그저 갈 뿐이었다. 그때의 지하철 풍경은 그저 사람들의 뒷모습과 사람들과 무언가가 뒤섞여 나는 알 수 없는 독특한 냄새로 기억된다.

그래도 퇴근길의 마음가짐은 출근길 보다 한결 가벼웠고 특히 사무실 건물을 나왔을 때 해가 지지 않고 여전히 밝은 한낮일 때는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서 다시 하루를 시작해야 할 거 같은 상쾌함 마저 느꼈다.


그렇게 가볍게 나섰던 퇴근길, 이른 퇴근 시간이라 지하철 플랫폼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한적한 퇴근길에 기분이 좋았다. 의자에 앉아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며, 이어폰을 한쪽 귀에만 꽂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나는 대부분 저장되어 있지 않은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잘 받지 않는다. 그런데 한적한 지하철 풍경이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는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sk텔레콤 광고 동의에 연락드린 ooo입니다. ooo님 맞으시죠?”

“네”

“다름이 아니라, 고객님께 꼭 맞는 보험을 하나 소개해드리려고 하는데요.”

“괜찮습니다.”


나는 바로 괜찮다고 했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런데 남자 보험사는 내가 전화를 끊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의지로 속사포같이 말을 쏟아내었다.


“고객님 나이가 이제 결혼도 준비하시고 아이도 낳고.”

“괜찮습니다.”


나는 보험사가 내 나이를 정말 알고 얘기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더 듣고 싶지 않았기에 전화를 끊고 싶었다. 마음속으로는 ‘내 나이는 아직 이십 대고 요즘 누가 이십 대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죠.‘라고 대답했지만 말로는 괜찮다고 정중히 대답했다. 그런데 그 뒤에 덧붙인 보험사의 말에 나는 그만 흥분해서 마음의 말을 내뱉어 버렸다.


“고객님 결혼하셔야죠? 아이도 낳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셔야죠.”

”뭐라고요? 됐다고요. 제가 결혼을 하든말든 아이를 낳든말든 필요 없다고요! “

“고객님…“


뭐라고 더 얘기하는 보험사의 말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적한 지하철에서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한 게 느껴졌고, 나는 만화에 나오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바람을 내뿜는 우스꽝스러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을 지하철 유리문을 통해 보았지만 쉽게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 결혼이나 아이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언젠가는 뭐 하겠지 아니 어쩌면 안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뭐 어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결혼’, ‘아이‘ 그리고 ’ 남들처럼‘, ’평범‘ 이 네 가지 키워드는 한참 커리어를 쌓고 있는 이십 대에게 매우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 보험사는 고객의 정보를 정확히 인지하지 않고 상담을 시도했거나 어리바리 이십 대가 걸려들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알면서도 그런 단어들로 상담을 시도했다면 나의 업무 중 하나였던 고객상담 시 대응법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평범이 마치 그저 그런 삶이란 의미 같아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입으로 너도 평범하게 살아야지 그것도 남들처럼 이란 이야기는 더욱 듣고 싶지 않았다.


그날은 그냥 어디론가 갔어야 했다. 날씨도 좋고 이른 퇴근에 기분도 좋고 지하철은 한적했기에.


화, 목,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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