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병, 그건 어느 나라 병인가요?
그냥 기분이 좋은 날이 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이 가뿐하다거나 아침 햇살이 포근하게 느껴진다거나 그냥 이유 없이 기분 좋은 날 말이다. 이어폰을 꽂고 무슨 가사인지도 모르는 팝송을 들으며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 안에서도 ‘괜찮아’ 할 수 있었던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지하철 손잡이에 손이 닿지 않아 멀찌감치 떨어진 의자 옆 기둥을 사람들 사이로 겨우 한 팔로 붙잡고 버티면서도 오늘은 괜찮은 하루를 시작한 거 같다고 생각하는 그런 날이었다.
첫 번째 직장은 아니었고 나이도 이십 대 후반을 달려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요령이란 걸 모르고 나름 신입 같은 마음가짐으로 출근을 하던 때가 있었다. 우리 팀은 나까지 총 다섯 명이 있었는데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온 막내였다. 차장님, 과장님, 대리님 그리고 나를 포함한 사원 두 명이 전부였다. 그때는 인원도 적은데 왜 직급을 하나씩 붙여서 ‘내가 너보다 위‘라는 걸 보여줘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기도 했다. 아마 이것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정말 직장인 초급자였던 게 분명하다. 이 회사는 전공을 살리지 못한 내가 아웃소싱이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헤드헌터를 통해 갖게 된 두 번째 직장이었다. 첫 번째 직장을 다니고 있다가 9개월 만에 폐업을 하는 바람에 두 번째 직장을 구하기 위해 이력서를 오픈해 놓았었다. 헤드헌터라는 것을 안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헤드헌터를 통해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는 내가 제법 능력이 있어서 그런 줄 알고 우쭐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아니었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때는 다른 건 몰라도 자신감 하나만이라도 절실히 필요하던 때였다.
근무했던 회사에는 대략 700명 가까운 직원이 소속된 중견 기업이었지만 업종 특성상 대부분 영업직이라 내부에서 상시 근무하는 직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대부분 여성 직원들이었다. 우리 팀도 모두 여자뿐이었다. 나는 웹디자이너로 입사했지만 막내답게 팀 안에서 발생하는 잡다한 일은 대부분 했던 것 같다. 사이트 관리, 게시글 관리, 사이트 내 고객 상담, 사이트 활용에 관한 내부 직원 교육, 자료 관리, 비품 관리 등의 업무를 했다. 실제 디자인과 관련한 업무는 매우 적은 부분을 차지했고 사이트에 필요한 운영 디자인 업무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번째 직장에서 5년을 근무했다.
팀에서 제일 높은 직급의 차장님은 굉장히 여성스럽고 정이 많은 분이셨다. 언제나 상냥하게 웃으면서 조곤조곤 얘기하는 스타일이었다. 상대방과 대화 도중 자주 얼굴을 붉히셨는데 그건 화가 나서인 경우보다 부끄럽거나 민망할 때 혹은 웃길 때였다. 간혹 화를 낼 때도 하얗던 얼굴이 붉어졌지만 거의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화가 나도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이 약간 빨라지고 얼굴이 붉어져서 꼭 낭랑 십팔 세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반대로 대리님은 정반대의 타입이었다. 평소에도 웃지 않으면 다소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나 화났다’라고 목소리와 얼굴에서 그대로 묻어 나왔다. 건들면 누구라도 물어버릴 거 같은 모습이었지만 선을 잘 지키는 타입으로 이상하게 감정 없이 딱딱하게 말해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 공과 사를 명확히 지켜서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해서였던 거 같다. 그리고 그 사이에 약간은 아리송한 과장님이 있다. 목소리가 굉장히 부드러워서 화를 내고 있어도 화를 내는 건지 잘 모르겠던 평소에 내게 다정했던 분이었다. 그날도 나는 오고 가는 정을 베풀며 늘 그랬듯 과장님께 친절했다. 주말엔 이러쿵저러쿵 어떠했냐며 안부를 묻고, 점심엔 친절한 미소로 뭐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묻는 과장님께 아무거나 괜찮다며 드시고 싶은 거 먹자고 했다. 특기 중 하나인 나보다 불우한 이웃에 대한 측은지심이 진하게 묻어 나오는 대목에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사뭇 진지하게 고민 아닌 고민스러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 내게 그날은 과장님이 악의는 없다는 듯한 동그란 눈으로 내게 말했다.
"자기 혹시 천사병이야? 그런 거 있잖아. 모든 사람한테 착하고 친절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
순간 내 안에서 불쾌감이 올라왔다. 기분이 나빴다. 어째서인지 순수해 보이는 눈동자와 또랑또랑한 발음으로 나를 보고 있는 과장님에게 나는 처음으로 화가 났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때때로 나와 제일 가깝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도 재고 따지며 불친절로 응대할 때도 있었다. 내 몸이 피곤하고 귀찮을 때는 변명을 하며 약속을 취소하기도 했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못 본 척하기도 했다. 그런 내가 천사병이 아니냐는 소리를 듣다니. 너무 과분하지 않은가.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과장님의 발음이 너무 정확해서인지 내게 했던 말만은 분명히 기억하는데 내가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대답을 못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우물쭈물하거나 어색한 미소를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의 얼굴은 해맑았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하지만 나에게는 비아냥거림으로 느껴졌다. 그 뒤로도 과장님에 대한 내 안의 불쾌감은 불현듯 지속되었다. 이 사소한 불쾌감이 점점 커져서 어느 날 분노가 되어버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날 나는 퇴근길에 이렇게 생각했다.
‘앞으로는 과장님이 뭐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물어보면 아무거나 라고 얘기하지 말고 콕 집어서 얘기하자.‘
나의 친절함이 천사병 걸린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과장님에게 불친절한 사람으로 남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고작 생각한 게 먹고 싶은 거 얘기하기라니. 그때의 나는 그래도 순수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