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 동경 그리고 의지

윤회나 전생의 너머

by 스티븐

단 한 번의 삶 - 김영하




과거에서, 그의 존재를 긍정한 부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현재의 삶의 태도로, 치열함과 동시에 그저 주어진 삶에 천착하지 않은 경험을 논한다.


미래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진 불가역함을 인정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함을.


그의 필력에 질투심이 하늘을 찌르고, 가벼운 존재감이 치밀어 상실하지만,

또 그의 진솔한 담론과 그도 ‘평범한 가정의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담긴 단 한 번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라는 사실에 감사하며.


- 내가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이겠다고 한다.

- 아내는 그게 가능하냐고 묻는다.

- 나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아주 쉽다고 대답한다.

- 아내는 그럴 리 없다고 불신한다. “내 주변에서는 아무도 안 해. 왜 그럴까?”

- 아내를 열심히, 꾸준히 설득한다.

- 아내가 그럼 일단 조금만 해보라고 한다.

- 샘플을 보여주거나(대부분의 경우) 바로 실행에 옮긴다.

- 말처럼 쉽지 않음이 곧 밝혀진다(또는 재난이 발생한다).

- 자기 말이 또 맞았음을 안 아내가 마음 약한 자신을 탓한다.

-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나는 미친 듯이 그 일에 몰두한다.


그리고 책 속의 사유할 만한 문장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초록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환대보다는 적대를, 다정함보다는 공격성을 더 오래 마음에 두고 기억한다.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실망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실망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대도 함께 돈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텝도 작다.


제사는 산 자들이 정색하며 공연하는 한 편의 연극이며 주제는 기억이다.


인간은 보통 한 해에 할 수 있는 일은 과대평가하고, 십 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과소평가한다.


잘 쓰인 시나리오라면 인물은 결말에서 시작과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현실의 인간은 그냥 나이를 먹고 호르몬 수치가 달라지면서 변하겠지만 고작 두 시간 동안 진행되는 영화에서는 ‘도발적 사건’을 통한 ‘의미 있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런 영화가 관객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


텍스트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저자와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무한히 재생산/재창조될 대상이다. 텍스트에서 저자는 명목상의 저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텍스트에서 오독이란 무의미한 말이다 -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론

아내와 함께 다니던 대학에서 배웠던 인터텍스튜얼리즘(Intertextuality, 상호텍스트성)을 회고하게 만든 문장이다.


그랬다. 이야기는 고통과 카타르시스를 교환해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장치였다. 중략. 이야기 속에서 한 인물이 큰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은 인물이 그 고통의 의미를 안다는 뜻이다. 한 시간의 요가를 마친 뒤 매트에 편안히 누워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를 때마다 내 마음 한구석에서 치밀어 오르는 희미한 불안이 있다. 이것이 지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이고, 만일 이보다 더한 고통이 찾아온다면 나는 속절없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떠난 사람은 루저가 아니라 그냥 떠난 사람일 뿐이다. 남아 있는 사람도 위너가 아니라 그냥 남아 있는 사람일 뿐이다.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