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로 모인 가족의 한 달
한 달의 시간 동안 우리의 목적성을 정당화하듯 살아왔다는 건 거짓말이다. 불과 일주일 만에 딸아이는 '아빠 나 방으로 다시 들어갈까?'라는 의문형 질문을 해왔다. 당혹스러웠지만 티 내지 않고, 고집하고 싶었지만 설득이 아닌 듯 무심히 한 마디만 조언했다.
'조금 더 지내보고 결정하는 건 어떨까?'
우리의 변화에 한 달 정도조차 지내보지 않고 결심을 뒤바꾼다는 건 시작 자체를 부정하는 듯했다. 하지만 고집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한 달 후 딸아이가 단정적 발언을 한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일부 변화는 있었다.
'수학'이라는 집중이 필요한 경우의 수는 꽤 심난했나 보다. 거실 밖 대로변의 변화와 '보리'라는 우리의 애정이 뛰어다니는 상황에서 '풀이과정'이라는 집중도를 요구하기에는 당장의 변화는 쉬이 허락지 않았다. 해서 거실 책장 앞 독서대 목적의 긴 책상은 '집중을 요구하는 수학 풀이 전용 책상'이라는 목적으로 타협했다. 그리고 아비의 늦은 귀가를 틈타 딸아이 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한 가정의 의사결정의 팔 할 이상의 힘을 가진 '마님'의 의사결정이니 아쉬웠지만 목적에 부합하는 '조정'이라 이해하기로 마음먹고 언급하지 않았다.
거실을 바라보고 길게 늘어섰으며 보리의 ㄷ 자 캣워크 동선을 완성했던 소파의 위치도 원복되었다. 아내의 주장은 명확했다. 보리의 털이 날리고, 해를 등지며, 쉬이 앉기에 동선이 멀다는 것. 크지 않은 거실에서 변명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나조차도 그랬다. 소파에 거의 앉지 않았다. 독서도 책상에서, 잠시 휴식도 책상 앞 의자에서. 딸아이와 아빠의 의자는 있지만 엄마의 의자는 없었다. 소파도 저 멀리. 그렇다고 식탁이 엄마의 의자여서는 안 된다. 해서 아내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소파는 원복 시키되, 보리의 여러 보금자리들은 창가로 옮겨주었다. 보리도 좋아하는 눈치다. 어릴 적 원형 안락공간에 자주 들어가 자는 걸 보면.
딸아이는 자기 방에 더 공을 들이고 원하던 변화를 꽤했다. 물리적 여지가 많아진 딸아이 방에 수학집중용 책상 외에도 그간 바람해왔던 것들을 이루어 주었다. 딸아이는 핑크색 벽지와 하늘색 천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초등학생 이전의 유아적 디자인을 꽤 심난해했다. 너튜브에 올라가는 딸아이의 기타연주와 보컬에 이 같은 배경은 장난기처럼 보이기에 충분했으니까. 이 역시 딸아이의 거듭된 요구를 아내는 못내 들어주는 척만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딸아이에 대한 아내의 사랑은 위대하다.
사람의 손을 빌어 도배를 새로 해주자는 내 의견을 지나, 무해한 수성 페인트를 주문해 손수 페인팅작업을 단행하셨다. 이럴 때 아내는 나보다 훨씬 위대해 보인다. 멋진 방으로 탈바꿈한 딸아이 방의 모습에 감탄하며, 난 그저 덧댄 방수포와 테이프를 거두고 청소를 도왔을 뿐.
그 후의 변화는 극적이다. 드디어 딸아이는 혼자자기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아내와 나의 잠은 좀 더 안온해졌다. 온전히 가족 구성원 각자의 잠을 인정하는 환경으로의 변화. 쉽지 않지만 우린 드디어 해냈다. 고집할 건 고집해도 분명 한 건 가족 구성원 모두의 이해다. 우리의 한 달은 그렇게 지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