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그리고... #1

기변의 배경

by 스티븐


반성한다. 엄마와 딸의 관계는 부녀, 부부 혹은 모자의 관계와는 다르다. 살아보니 그렇다. 하지만 그 관계를 '생활'이라는 핑계로 잘 챙기지 못했다. 인정한다. 그래서 반성한다.


아들로서, 백년손님으로서의 나는 어떠한가? 이놈의 회사가 스트레스 만드는 인과관계가 적적히 쌓여가는 시간. 2005년 7월에 입사. 3개월 후면 만 18년. 참 오래도 다녔지. 1997년 송능한 감독작 영화 넘버쓰리에서 이런 명대사를 최민식 씨가 뇌까리지. '죄가 무슨 죄가 있어'


그렇다. 누가 일이 스트레스라고 하나. 사람이 스트레스지.

시간이 갈수록 이용하려 들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성과 평가라는 미명아래 사람의 고생을 하향 평준화하고, 고르고 골라 부서를 책임지는 당신의 것으로 포장하는 것을 목도하는 시점.

안다. 회사 정문 밖을 나서는 순간 갑이 아닌 더 심오한 을의 세계로 나간다는 것을. 경험과, 선배들의 조언 등이 타산지석화 되어 있다.


뼛.속.깊.이


아울러, 지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차게 사표를 던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 복지 때문. 그중 단연 으뜸은 가족의 건강과 관련된 복지다. 단체 플러스 상해보험 제도. 이것 때문에 부모, 처자식, 처의 부모까지 병원비의 팔 할이 모두 지급되는 규모를 무시할 수 없다.


시간이 갈수록 칠순을 훌쩍 넘긴 장모님의 병원의 가짓수가 늘어간다. 처음엔 정형외과. 단순 타박상 등의 수준이었다면 이제 혈압약과 고지혈증과 같은 고비용 약제와 함께 각종 내과, 검진 등이 뒤따르는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물론 아내의 시어머니도 심각하다.)


올해 초 스페인 가족 여행에서도 또 한 번 실감. 함께 다니는 팀 중 반 이상이 엄마와 딸의 관계. 이거 정말 부럽고 좋아 보이더라.



좋은 건 가족과 함께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의 태생으로 회귀하는 것이 순리



아닐까? 하지만 순리는 변치 않는다. 시간이 별로 없다. 장모님께서 쉬이 동행하실 시간. 10년이나 남았을까. 당신께서 비행기 타고 그 먼 나라의 코쟁이들을 자주 보신 적도 없으실 테고, 남들이 지어놓은 아름다움에 탄복하여 새로운 마음을 챙기실 여지도 많지 않다.


나도 딸 가진 아버지다. 떠올려보자. '아내와 딸의 여행'. 당연했던 것. 필요했던 것. 딸의 입장이라면, 한 번쯤 마음 한편에 저장해 두고, 붙여 넣기 해야 할 당연한 여행. 그걸 우리는 누가 떠올려주면 그새 후회라는 스킬로 위안을 반복하는 것일지도.


스위스 융프라우와 아름다운 계곡 그리고 초록 언덕들. 이탈리아의 명지 산책로. 프랑스의 유물 박물관들을 그렇게 보여드리고 싶단다. 해서 보내드렸다. 유럽 3개국.


그리움. 평온한 스위스 산골마을.
2019년 융프라우의 광활한 빙하. 입이 떡 벌어졌지.


여행을 준비하며 그간 남편이 했던 모든 것들을 아내는 순순히 해냈다. 옆에서 느끼기에 어렵지 않게.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내게 조금씩 고마움을 느낀 것 같다. 여행의 준비와 시작까지 켜켜이 쌓인 나만의 노하우들이 아내에겐 생경한 것이었을 테니.


여행을 떠나는 날. 당연히 차로 공항까지 모셨다. 인간에게서 기계로 대치된 항공사 데스크가 얄궂게 느껴졌다. 하지만 사위로서 밴딩 머신에 장모님의 짐을 올리고, 키오스크가 가르치는 순서대로 온전히 태깅하고 짐을 부쳐드렸다. 아내 것도, 처제 것도.


드디어 출국장. 세 모녀의 여행 시작이다. 장모님은 연신 '고맙다'는 표현을 하신다. 당연한 건데. 이제야인 건데. 오히려 송구스러운 마음이 가득한 순간이다. 뒤돌아보며 인사하는 아름다운 세 모녀의 여행 시작을 사진으로 남겼다.

잘 다녀오세요 장모님. 신나게 즐기시고요.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 중 아내는 내게 고마움을 느낀 건지. 한 마디 남기셨다.

'당신도 사고 싶던 자전거 사' - 으흐흐흐흐흐. 역시나 남자는 장난감이다. 다 필요 없다. 손에 쥐어주면 만사오케이.


아내에게 인정받거나, 뭔가 장난감 구매를 설득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장모님께 잘해라. 그럼 100% 통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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