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티파이의 랩드(Wrapped) 이후로 많은 플랫폼에서 한 해 이용 내역을 정리해주는 '연말결산' 서비스가 성행한다.
문학 분야에서는 아마도 이동진 평론가가 '파이아키아'에서 한 해 읽었던 책들 중 최고의 책을 꼽는 것이 가장 주목도가 큰 컨텐츠가 아닐까 한다.
나 역시 연말결산을 해볼까 한다.
대상은 올해 '읽었던' 책이다. 따라서 출판연도는 중구난방이다.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 수리보고서』는 위에서 언급한 이동진 평론가의 채널에서 2024년 최고의 책으로 로선정되기도 했다. 나는 이 책을 올해에야 읽었는데, 과연 그럴만 하다고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릴 적 아픔을 갖고 있는 '나', 영두가 창경궁의 대온실 수리 업무를 맡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영두는 단순히 대온실을 '수리'하는 일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아픔을 치유하게 된다.
이 섬세하고도 따뜻한 여정을 읽어나가면서, 김금희 작가에 대해서 또 한 번 놀라게 됐다. 나는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단편소설을 굉장히 좋아한다. 주변 지인들에게 내가 여태껏 읽어왔던 모든 단편소설들 중에서 최고의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하고 다닌다. 이 작품은 자주 생각이 나고,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감동을 안겨준다.
『대온실 수리보고서』를 읽으면서 놀란 이유는 「너무 한낮의 연애」와는 다른 결의 감동이 작품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두 작품 사이에 놓여있는 10여 년의 시간이 작가 안에 고스란히 체화된 것이 아닌가 짐작했다.
올 한해 안전가옥의 책을 제법 읽었다. 그중에서도 권혁일 작가의 『첫사랑의 침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표제작인 「첫사랑의 침공」, 「세상 모든 노랑」, 「광화문 삼거리에서 북극을 가려면」, 「하와이안 오징어볶음」 총 4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네 편 모두 참신하고 재밌는 설정을 가지고 쓰여졌다. 제목처럼 첫사랑 누나가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인 「첫사랑의 침공」이거나 색깔을 다루는 신과 노란색만 보지 못하는 색맹이 나오는 「세상 모든 노랑」, 「첫사랑의 침공」과 세계관이 이어지는 「광화문 삼거리에서 북극을 가려면」, 그리고 외계인인 줄 알았던 아내가 북한 간첩이었던 「하와이안 오징어볶음」까지 때로는 절절하고 때로는 웃픈 로맨틱 코미디가 담겨있는 책이다.
처음 책을 덮었을 떄는 「첫사랑의 침공」이 제일 인상적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자꾸 생각나는 건 「하와이안 오징어볶음」이다. 그래서 도대체 '하와이안 오징어볶음'이라는 괴식은 무슨 맛일까.
올 한해 가장 뜨거웠던 책은 바로 이 책이 아닐까. 박정민의 문구가 없었어도 충분히 독자들의 인정을 받았을테지만, 박정민의 문구를 더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책이기도 하다.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스무드」,「혼모노」,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우호적 감정」, 「잉태기」, 「메탈」 총 7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이전 작품집인 『빛을 걷으면 빛』도 흥미롭게 읽었는데, 확실히 『혼모노』는 젋은 작가의 소설집이라는 인상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혼모노」가 던지는 메세지와 내용이 흥미롭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최고의 작품은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를 꼽고 싶다.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관점 역시 독특했다. 이전의 이 소재를 다룬 작품들은 주로 그곳에서 희생된 열사들이나 그들을 억압했던 이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성해나는 대공분실의 설계자에 렌즈를 들이민다. 그리고 한 인간의 광기를 내밀한 깊이까지 내려가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김금희 작가와 마찬가지로 성해나 작가 역시 시간이 이 작가에게 선물할 깊이가 더욱 기대되는 동시대 작가이다. (김금희 작가와 성해나 작가 모두 등단하고서 3년 정도 청탁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득해지곤 한다.)
2025년 읽었던 소설 중 가장 충격적인 작품이 무엇이었냐고 물으면, 나는 신종원의 『전자시대의 아리아』를 꼽을 것이다. 내가 게으른 탓도 있겠지만, 나는 한동안 한국 현대소설에 대해 거기서 거기라는 알량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그동안 내가 놓쳐온 것들이 많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밴시의 푸가」, 「전자 시대의 아리아」, 「멜로디 웹 텍스처」, 「옵티컬 볼레로」, 「저주받은 가보를 위한 송가집」, 「비밀 사보 노트」, 「보이스 디펜스」, 「작은 코다」 등 총 8편의 작품이 실려있다. 신종원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한계를 극한까지 실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문자라는 매체에 얽매이지 않고 사운드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음악, 종교, 건축, 역사 등 다양한 소재를 망라하며 실험을 이어가는 그가 어떤 연구 결과를 보여줄지 2026년에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