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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하긴, 순애야.

- 이희주의『크리미널 러브』를 읽고

by 고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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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희주는 2016년 제5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에 『환상통』으로 당선되며 등단했다. 아이돌 팬의 광기 어린 사랑을 담은 이 소설은 아이돌 팬덤의 지지와 반발을 불러 일으키며 화제를 일으켰다. 이를 통해 아이돌 팬덤의 대변인적인 위치에 자리잡기도 했다.


그 이후, 10여 년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쳐오며, 2025년에 단편소설 「최애의 아이」로 제16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으며, 「사과와 링고」를 통해 2025년 이효석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두 작품 모두 『크리미널 러브』에 수록되어 있다.)


『크리미널 러브』에는 총 8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조금 독특한데, '널'을 생략해서 크리미 러브로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희주가 그리는 사랑의 형태가 범죄의 냄새를 풍기는 광기와 부드러운 촉감을 지닌 순애와 섞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0302♡



첫번째 소설 「0302♡」은 '사거리의 미소년'이라는 특이한 존재가 등장하는 소설이다. 만나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 신비한 존재와 만난 '희주'와 '유리'의 학교 생활이 담겨 있다. 다소 신비적인 내용인데, 이 소설은 그동안 이희주가 써왔던 아이돌-팬의 관계가 지니는 모호한 부분을 탐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유리'는 이를테면 이희주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름인데, 주로 아름다움, 구체적으로는 아이돌을 상징하는 페르소나인 것처럼 보인다.



2. 최애의 아이



두번째 소설은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최애의 아이」다. 제목만 들어서는 동명의 인기 애니메이션이 떠오르지만, 여기서 '아이'는 정말 '아기'다. 공여된 정자를 통해서 최애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희망에 가득찬 주인공 '우미'가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이 소설 안에서 우미의 최애는 바로 '유리'다. 아이돌이 되기를 희망하던 「0302♡」의 '유리'가 정말로 유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묘한 혈연관계를 살펴볼 수 있게 만든 흔적이다.


여담으로 이 소설이 발표된 계간 문학동네에서 이 소설을 읽었을 때, 개인적으로는 충격을 받고 2025년에 젊은작가상을 받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해본 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고, 이 작품이 이 소설집 전체에서도 가장 탁월한 작품임을 부정하긴 어려울 듯하다.



3. 마유미



위즈덤하우스의 위픽시리즈로도 출간된 바 있는 중편 소설이다. 버튜버 마유미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지배하기 위한 여러 인물들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또한 희구대라는 가상의 공간에 깃든 설화를 통해 이야기의 주제를 한층 더 부각시킨다.



4. 해변 지도로부터의 탈출



이희주의 소설은 읽기가 거북한 지점이 중간 중간 나올 수 있어도 읽기가 어려운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거북함은 작가가 의도한 바이고, 작가의 장점 중 하나는 가독성이 좋은 문장과 단어들을 구사한다는 점에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소설은 예외적으로 읽기가 다소 어려웠다. 구성 자체가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현실과 가상, 그리고 시간대를 수시로 넘나드는데, 그 경계가 다소 불친절하기까지 하다.



5.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



이 소설은 미와 추의 경계와 정체에 대해 천착해 온 작가의 관심 분야가 잘 드러나는 작품인 듯하다. 결코 아름답지 못한 외형을 가진 자신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해준 사람에게 맹목적인 헌신과 사랑을 바치게 되는 이 이야기는 서글프기까지 하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아름답지 못한 존재의 이야기는 오래도록 사랑받아 왔다.


또한 미추가 자연적으로 구별되듯이, 그에 자연발생적으로 수반되는 권력, 계급, 신분의 상하와 격차에 대해서 곱씹어볼 수 있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반전이 나름 흥미로웠다.



6. 천사와 황새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은 '우미'와 '유리'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작품들과 이름을 공유할 뿐, 설정이나 배경은 전혀 다르다. 특이하게도 천사 얼굴의 부유체가 세상에 강림하고, 그로 인해 출산이 멈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남자들도 출산에 나선다는 독특한 배경을 가진 소설이다.




7. 사과와 링고



2025년 이효석 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돈은 피보다 진하다. 그러나 때로는 피가 돈보다 지독하다.




8.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도 역시 '우미'인데, 우미의 최애는 마찬가지로 '유리'다. 유리가 군산 출신인 점은 「최애의 아이」와 동일하나, 세세한 설정 같은 것들이 비틀려져 있어 정확히 동일한 세계관의 동일 인물들의 이야기인지는 애매하다.








『크리미널 러브』를 다 읽고 나자 올 여름 이희주가 불붙였던 알페스 팬픽 논쟁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크리미널 러브』 마지막에 각 소설의 발표 지면을 보니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는 올 7월에 발표된 작품이었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의 주인공 우미와 영하는 '유리'의 팬픽을 쓰던 사람들로 설정되어 있다. 작가 스스로도 팬픽을 쓰기도 하거니와, 이 작품을 쓰면서 그 쪽에 생각이 쏠린 나머지 그런 애정을 가감없이 드러냈던 게 아닌가 싶다.




또한 '유리'의 혼종성이 작가에게 가지는 의미를 곱씹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데뷔작 『환상통』에서도 정말 뛰어난 설정이라고 생각했던 지점이, 바로 아이돌 '민규'를 사랑하는 팬 만옥을 사랑하는 평범한 남자의 이름을 '민규'라고 지어준 것이다. 이름은 사실상 한 사람의 정체성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같은 이름을 공유하지만 너무 다른 사람을 삼각 구도의 두 점으로 배치한 것은 작품 내에 깊이감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유리'라는 이름은 어떤가. 유리라는 이름은 남성의 이름으로도 쓰일 수 있지만, 동시에 여성의 이름으로도 쓰일 수 있다. 물론 보편적으로는 여성의 이름에 가깝다. 하지만 남성이 이 이름을 갖는다 해서 만옥, 순자 같은 이름처럼 튀어보이진 않을 듯하다. 『크리미널 러브』 에 수록된 어떤 소설에서 유리는 실제로 성별이 바뀌기기도 하고, 여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출산을 하기도 한다.


또한 소설 곳곳에 파편적으로 등장하여, 작가가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뉘앙스도 담고 있는 듯하다. 유리라는 이름은 일본에서도 사용이 가능하고 한국에서도 사용이 가능하다. 이처럼 성별과 국적의 모호한 혼종성을 담은 이름을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는 이유에 대해서 고민해볼 수 있을 듯하다.


(물론, 그냥 발음이 예뻐서. 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원래 사랑은 이름을 앓는 순간이 절정이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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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회전>, 무례하긴 순애야.





인기 일본 만화 《주술회전》에는 이런 명대사가 나온다.




무례하긴, 순애야.





도저히 일반적인 관점에선 순애라고 보기 어려운 이 관계는 도리어 순애를 이루는 감정 중 하나가 '광기'가 아닐까를 질문케 한다. '무례하긴, 순애야.'를 소설의 언어로 써내는 사람이 바로 이희주다. 어쩌면 그래서 『크리미널 러브』 의 뒷표지에 '광기는 순애의 최댓값'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게 아닐까. 두 감정은 어쩌면 가죽만 다르게 쓴 하나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는,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게걸스럽게 탐미하는 광기에는 경계도 없으며, 성별과 대상도 중요하지 않다. 이것도 사랑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사랑이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어서 작가는 지난 10여 년 동안 소설을 끊임없이 적어온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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