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詩, 그리고 네루다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시인이자 정치인이다. 1971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영화로도 인기가 있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칠레의 자존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시는 자연을 노래하고 있고, 아름다움을 노래하지만 그가 직접 회고록에서 서술하고 있는 그의 과오는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1920년대 후반 실론(스리랑카)의 영사로 재직하던 20대의 네루다는 자신의 방을 치우던 하층 계급의 여인을 강제로 범한다. 그는 회고록에서 그녀를 '검은 조각상'이라 묘사하며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그 일을 저지르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내내 차가웠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일은 남자가 조각상과 함께 하는 일 같았다. 그녀는 나를 무시했고, 그 일이 끝난 후 아무 말 없이 나가 오물을 치우는 일을 계속했다." 네루다는 이 경험을 두고 결코 반복되지 말았어야 했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지만 이것이 진정한 참회로 느껴지진 않는다. 30대의 네루다는 결혼한 첫 번째 아내와 유일한 딸, 말바 마리나를 버렸다. 자신의 예술적, 정치적 행보에 누가 될까 두려웠을까? 머리가 비대해지는 지적, 신체적 장애를 동반한 난치병인 수두증을 안고 태어난 자신의 딸을 두고 '완성되지 않은 존재' '괴물 같은 생명체'라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지인들에게 드러낸 사실을 보면 그가 평생 시를 지으며 노래하던 세상의 그 아름다움 이면의 추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다.
상념에 젖다 보니 10여 년 전 보았던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떠올랐다. 당시 감독은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력 사건을 접하며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는 소회를 밝히며 일부 어른들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한 정황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담았다. 영화는 가해자와 그들을 둘러싼 어른들의 양심을 덮는 행위가 덤덤하게 전개되고, 손자의 과오로 괴로워하는 할머니 미자만이 피해자 삶의 마지막 흔적들을 가슴에 담으며 강물에 몸을 던진 어린 희진의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를 쓰고 싶지만 도무지 써지지 않는다던 그녀는 결국 맞닥뜨린 고통을 정확히 바라보는 과정 속에서, 고통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시의 언어를 체화한다. 희진이 겪었을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며, 혼연일체가 되어 써 내려간 시 '아녜스의 노래'는 영화의 마지막을 서늘한 아름다움으로 장식하고 있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한가요.... 서러운 내 발목에 입 맞추는 풀잎 하나...' 할머니 미자의 목소리로 낭송되다 희진의 목소리로 바뀌며 화면을 가득 채우던 희진의 얼굴과 말없이 흐르던 검은 강물의 잔잔한 파동은 마음에 스며드는 진혼곡이었다.
에세이집 <고요한 읽기>에서 이승우 작가는 '나'를 세상의 끝으로 표현하고 있다. 끝에 가서 만나게 되는 사람은 그 등을 가진 사람, 자기 자신이라고. 나는 나에게서 가장 멀리 있고, 한사코 도달하지 않으려 한 자신의 내부라고 말이다. 밖을 향한 시선을 안으로 돌리기까지는 힘겨운 투쟁을 벌어야만 할 것이다. 온전한 '자신'이 되는 일은 불가능의 영역일지 몰라도 언제일지 모를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놓지 않고 이 고단한 과정을 습관처럼 반복해야 함을 스스로에게 주문처럼 새긴다.
자신의 과오를 고백이라는 포장을 씌워 회고록에 써 내려갔지만 네루다는 그 회고록에 딸을 버린 사실은 크게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인생의 후반에 접어들어서도(회고록을 쓰던 그 당시에도!) 어쩜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 여겼던 건 아닐는지. 어쩜 한 사람의 인생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을 만한 사건이었음을 그는 끝내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자발적인 고백에는 자랑의 성격이 섞여있다 말한 이승우 작가의 말처럼 그의 고백은 그가 지어놓은 여러 詩의 영마저 흐리게 만드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