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싹두기

박완서님의 '호미'

by winter flush

사랑하는 작가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박완서 작가입니다.

탄천 산책길에 만난 꽃들을 반기다 문득 박완서 님의 봄을 만나고 싶어졌습니다.

책꽂이 사이를 훑다 꺼내 든 책이 '호미'입니다.

책을 펼치자마자 '봄'이 와르르 쏟아집니다.

하얀 눈 사이를 뚫고 올라오는 노란 복수초를 시작으로 배어버린 목련의 왕성한 생명이 뿜어내는 경이로움에 감탄할 즈음이면 꽃에 출석부를 만들어줘야 할 만큼 마당 가득 꽃이 만발합니다.

노동하는 불편을 부러 택하며 아파트 생활을 접으신 작가님의 선택은 자연이 한 일이 옳듯 옳았습니다.


노란 꽃이 밤에는 오므렸다가 낮에는 단추만 한 크기로 펴지기를 되풀이하는 사이에 줄기도 나오고 잎도 생겨난다.


...


그 작고 미미한 것들이 땅속으로부터 지상으로 길을 내자 사방 군데서 아우성치듯 푸른 것들이 돋아나고 있다. 작은 것들은 위에서 내려앉은 것처럼 사뿐히 돋아나지만 큰 잎들은 제법 고투의 흔적이 보인다. 상사초 잎은 두껍고 딱딱한 땅에 쩍쩍 균열을 일으키며 솟아오른다.


...


작년에 그 씨들을 받을 때는 씨가 생명의 종말이더니 금년에 그것들을 뿌릴 때가 되니 종말이 시작이 되었다. 그 작고 가벼운 것들 속에 시작과 종말이 함께 있다는 그 완전성과 영원성이 가슴 찐하게 경이롭다.


호미中


봄의 예찬, 침묵으로 돌아본 인생사, 추억의 음식과 그리운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딸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모두 읽다 보면 하나하나 삶을 정리하듯 글을 쓰신 게 느껴집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완벽하게 정직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그건 '농사'밖에 없을 것 같다고 하신 글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내 손에도 호미를 쥐어볼 날이 올까요?..

완벽하게 정직함, 그 순수의 삶을 꿈꾸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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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흘려 그걸 한 그릇씩 먹고 나면 뱃속뿐 아니라 마음속까지 훈훈하고 따듯해지면서 좀 전의 고적감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이렇게 화목한 집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는 기쁨인지 감사인지 모를 충만감이 왔다. 칼싹두기의 소박한 맛에는 이렇듯 각기 외로움 타는 식구들을 한식구로 어우르고 위로하는 신기한 힘이 있었다.


...


내가 잊지 못하는 건 메밀의 맛보다 화해와 위안의 맛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호미中


칼싹두기라..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맛과 질감과 작가님의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한데 버무려져 감히 만들어보고 싶다는 도전정신이 올라오니 바로 메밀가루를 주문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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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가루만으로는 반죽이 힘들다니 파스타 만드는 밀가루도 섞어 봅니다.

고운 가루를 한 번 더 체에 거르고 주물주물 반죽을 만들어 비닐봉지에 넣고 한 시간 이상 숙성을 하였더니 단단하던 반죽이 밀대로 밀 정도로 부드러워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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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국수보다는 도톰하고 넙적넙적하게 칼로 썰어봅니다.

툭툭 잘리는 과정 하나하나가 전부 경이롭습니다.

반죽에 소금 간을 살짝 해야 하는데 깜박 잊었습니다.

분명 건강한 맛이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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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감 시킨 바지락이 맛난 육수를 만들려 대기하고 있네요.

굵은 멸치도 슥슥 볶아 육수 만드는 일에 동참시킵니다.

반죽을 밀고 자르고 바지락 육수를 내고 있으니 식구들이 부엌을 기웃거립니다.

아주 많이 먹을 거라면서 기대를 하네요.

건강한 맛으로 먹으라고, 사 먹는 것처럼 맛있진 않을 거라고 큰 기대를 살짝 누그러뜨려 봅니다.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한다는 데 대한 부담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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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많이 먹겠다는 식구들을 위해 한 냄비 끓였습니다.

구수한 냄새가 부엌에 진동합니다. 작가님의 고향의 냄새와도 닮았을까요?

감사하게도 식구들은 건강한 맛을 아주 좋아해 주었습니다.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비웠네요.

이렇게 맛있게 먹어주는 식구들 덕에 또 다음 메뉴를 고르게 됩니다.

아파트 생활이 너무 편해서 노동하는 불편을 택하신,

완벽하게 정직한 생을 꿈꾸신 박완서 작가님을 마음에 담고 오늘도 부엌에서의 노동을 즐겁게 누려봅니다.

싱그런 일요일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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