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 캐서린

영국에 홍차를 알린 포르투갈 공주

by winter flush

오늘도 난 혼자다. 궁정 사람들은 나를 기웃거리기만 할 뿐 그 누구도 선뜻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저마다 한 번씩 힐끗 거리는 그 눈빛이 나를 또 한 번 주눅 들게 만든다. 아이를 유산한 것이 벌써 세 번째다. 찰스는 더 이상 내게 기대를 하지 않는 눈치다. 그에게 새 정부가 생겼다. 처음 느꼈던 상실감과 질투심은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힐 힘마저 잃은 건지, 그의 정부들 에게도 무관심하게 된다. 오늘도 의회에서는 찰스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있다. 그가 나와의 이혼을 거부하는 이유는 뭘까? 힘들지만 잘 견디고 버텨야 한다. 포르투갈의 평화와 안정을 짊어진 무게가 이쯤이라면 달게 받아들여야겠지..

오늘도 차 한 잔에 위로받으며..


퀸 캐서린이 하루하루 그 날의 일기를 썼다면 그중 한 페이지엔 어쩜 이런 글이 담여 있지 않았을까? 국왕의 딸로 태어나 공주로 사는 삶, 그리고 다른 나라의 왕비가 되어 살아온 그녀의 인생은 보이는 화려함 뒤에 감춰진 서늘함이 어두운 그늘로 먼저 다가온다. 먼 영국 땅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낸 캐서린 왕비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숨 막히는 인생을 받아들여야 했다.

사랑 없는 결혼을 신의로 지킨 여자.

홍차를 통해 영국의 역사 여행을 하다 보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여인이 퀸 캐서린이다. 알코올로 찌든 영국을 한 잔의 홍차로 따뜻하게 덥혀준 여인. 그녀가 찰스 2세에게 시집오면서 챙겨 온 홍차 꾸러미는 궁정 사람들에겐 낯설고도 멋스러운 물건이었다. 그녀가 다구들을 꺼내놓고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려 마실 땐 모두들 기웃거리며 그 우아한 모습을 동경했겠지. 그녀의 이런 우아한 모습은 궁정 사람들에게 티타임이라는 작은 여유를 선사했고 차와 마주하는 시간은 그들에게 유행처럼 퍼지게 되었으며 서서히 서민들에게까지 퍼져 마침내 홍차는 영국의 국민 음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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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왕비는 남편 찰스 2세의 바람기에도 불구하고 평생 그에 대한 애정을 품고 살았다. 찰스 2세는 정부를 많이 둔 왕으로도 유명한데 정부를 가운데서도 악명이 높았던 캐슬마인 백작부인으로 인해 왕비는 마음고생이 심하였다. 캐슬마인을 왕비의 수석 시녀로 두려는 왕의 결정에 언짢아했다는 이유만으로 왕비가 데려온 시녀들은 모두 포르투갈로 쫓겨나게 되었고, 왕비의 외롭고 힘든 궁정 생활은 더욱 가혹해졌다. 그러나 캐서린은 인내하고 견디며 순종하였으니 그 마음을 깊이 느낀 걸까? 바람둥이 찰스 2세도 점점 그녀의 마음을 존중하게 되었으며 결국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존경과 애정을 얻어 내었다. 캐서린에게 왕비의 예우를 갖추기 시작한 찰스 2세를 두고 신하들은 국왕이 왕비라는 새로운 정부를 들였다고 하는 말까지 퍼졌단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 시집와 평생을 주위 사람들의 냉대 속에서도 마음의 온기를 잃지 않았던 캐서린은 안으로 파고드는 고독과 슬픔을 인내와 헌신으로 승화시켰으며 결국 찰스 2세의 존중과 인정을 받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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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5년 2월, 찰스 2세는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죽어가는 남편 앞으로 쪽지 한 장을 보냈는데 거기엔 이런 글이 담여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가 그의 인생에서 괴롭힘을 주었거나 불쾌했다면 용서해 달라는...' 이 내용을 읽는 순간 마음이 너무 아려왔다. 한 사람의 애정과 사랑을 기대하면서도 그 마음을 감춘 채 숨죽여 바라보기만 하고 차가운 가슴을 쓸어내리며 살아야 했던 한 가여운 여인이 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캐서린이 머물던 궁전은 그녀에게 흡사 얼음궁전과도 같이 차가운 곳이었으리라. 그 어떤 화려함도 그녀에게 돌같이 차갑게 느껴졌을 테니 말이다. 이 메시지를 받은 찰스 2세는 '이 가여운 사람.. 내게 용서를 구하다니.. 온 마음을 다해 그대에게 용서를 빌겠소.'라고 답했단다.

영국 국민들로부터도 의회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했던 왕비 캐서린.

찰스 2세가 죽자 그녀는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 남은 생을 신앙과 차의 힘으로 버티며 살았다. 그녀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가톨릭 신앙으로 그녀는 여생을 홀로 기도 생활을 하며 마무리했다고 한다.


영국에 홍차 씨앗을 던져 준 포르투갈 여인, 캐서린 브라간자. 힘겨웠던 그녀의 삶을 위로해 준 한 잔의 차는 많은 영국인들에게 따스한 위로의 차로 번져 지치고 힘든 이들의 시간을 보듬어 주었고, 지금도 여전히 영국인들의 영혼의 음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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