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tra Quality Ceylon
우바 지역의 작은 마을 하푸탈레 지역은 경관이 좋기로 유명하다. 해발고도 1500미터 경에 위치한 이곳은 사방이 차밭으로 둘러싸여 있어 어딜 가나 차향이 가득 묻어날 것 같은 아름다운 마을이다. 마을의 정상으로 올라가면 립톤 시트(Lipton seat)가 있다. 그 옛날 립톤은 이곳에 앉아 안개가 엷게 깔린 차밭을 내려다보며 어떤 상상을 했을까? 차밭 사이로 허리를 굽힌 채 찻잎을 따는 타밀족 여인네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풍경을 상상하니 그곳의 이슬과 바람을 곱게 품은 립톤 티 한 잔이 몹시도 마시고 싶어 졌다. 티백이 아닌 whole leaf의 질 좋은 립톤 티를 구하고자 백화점과 마트의 차 코너를 돌아보았지만 구할 수가 없었다. 티백으로 나온 립톤 티와 아이스티를 위한 가루차만 눈에 띌 뿐이었다. 얼마 전 기사에서 우리나라 차 음용률이 세계 하위 10%에 머문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차의 다양성을 기대하는 건 아직은 어려운 일인가 보다.
립톤 티에 대한 아쉬움은 일본 교토 여행 중에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교토에는 립톤 매장이 쉽게 눈에 띄었고, 대부분 음식을 함께 파는 식당 겸 티룸이었다. 점심시간에 맞춰 티룸을 찾으니 자리가 모두 차서 앉을 곳이 없었다. 조용한 티룸도 좋지만 활기찬 티룸의 풍경도 나쁘지 않았다. 음식과 함께하는 차는 또 다른 어울림이 있다. 특히 기름진 음식과 차는 잘 어울리는데, 스파게티, 피자, 햄버거 등과 함께 차를 마시면 차가 음식의 느끼함을 제거해주는 역할을 해서 좀 더 가벼운 식사를 했다는 기분이 든다. 몇 해 전 '홍차의 세계사, 그림으로 읽다'의 저자 이소부치 다케시가 한국에 와서 차와 티푸드의 궁합에 대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홍차와 커피, 그리고 물과 함께 음식들을 직접 먹어보고 그 느낌을 함께 나눠 보았는데 홍차와 함께 했을 때 음식의 맛은 더욱 담백하고 입안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달달한 케잌이나 쿠키 등 차를 마실 때 흔히 찾는 디저트만이 티푸드로 어울린다는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차는 떡이나 한과와도 잘 어울리지만 치즈와 페어링 해서 어울리는 차를 연구하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차를 많이 마시다 보면 칼슘의 배출이 많아지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차와 치즈의 궁합은 영양적인 면에서 볼 때 바람직하다. 맛에서도 홍차와 치즈의 어울림이 꽤 괜찮은 편이다.
교토역에서 가까운 립톤 매장에 들렀다가 마음에 드는 실론티를 하나 구입했다. 옥색의 고운 틴에는 Extra Quality Ceylon이라는 글씨가 정면에 적혀있다. 틴을 집어 든 순간 차밭을 일구느라 애쓴 제임스 테일러의 얼굴도, 스리랑카 다원을 사들여 신선한 실론의 찻잎을 실어 나르던 토머스 립톤의 여유 넘치는 미소도 잠시 스쳤다.
하푸탈레 지역의 립톤 시트에 앉아 차를 마시는 상상을 하며 차를 우려 본다.
여름의 싱그러움은 뜨거운 햇살이 아직 퍼지기 전인 이른 아침 매미 소리가 새어 나오는 무성한 초록의 나뭇잎 사이를 타고 올라온다. 나무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푸르름이 발현되는 숲 한가운데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를 온몸 가득 품어보던 숲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스치고 지나칠 바람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어 집의 창을 모두 열고 여름 숲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어 졌다.
여름 숲. 그 여름 숲의 발랄한 기운을 실론차로 잠시 빌릴 수 있을까? 틴을 열고 찻잎을 덜어내니 일정하게 잘린 찻잎에서 신선함이 살아 올라온다. 오렌지 빛이 살짝 도는 암갈색의 단정한 찻잎은 마치 숨을 쉬고 있는 듯 생생하게 다원의 향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찻잎이 살아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척 신선하다. 촉촉한 대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릇한 기운은 여름 숲을 싱싱하게 살려냈다. 숲 속을 걷듯 차의 향을 맡으며 천천히 차를 우린다. 실론의 향이 사방으로 퍼지고 이미 마음은 숲 한가운데 있다. 차를 우리니 질 좋은 차에서나 만날 수 있다는 포기크랙 현상이 일어났다. 수면 위로 안개가 내려앉듯 뭔가 신비로운 현상이 찻잔 안에서 일어나고, 내 기운은 1도 올라간다. 걷힌 안개 사이로 보이는 차를 한 모금 넘기니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느낌에 세련됨을 하나 더 얹었다. 긴 여운 끝에 살짝 조여주는 매력은 역시 실론 임을 각인시켜준다. 숲의 기운과 함께 온몸을 타고 흐르는 한 잔의 차로 몸과 마음은 이미 싱그러워졌고 요란하게 내리쬘 오후의 태양을 이길 힘도 살짝 얹어 준다.
한 사람의 노고와 한 사람의 상술이 10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넘겨가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실론차로 이어지고, 나는 또 이 한 잔의 차로 위로받고 명상하듯 차분해지는 하루를 보낸다.
스리랑카와 인연이 깊은 스코틀랜드인 두 사람, 제임스 테일러와 토머스 립톤. 하나에 집착하여 몰두하는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내 삶의 방향을 잡아본다. 뭐든 깊게 해 보지 않고는 그 일의 진정성을 가질 수 없을 것만 같고, 그 즐거움의 끝에 다다를 수 없게 느껴진다.
깊이 있게 다가가야 하겠다. 그것이 일이든 생각이든 사람 관계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