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의 의자
'나'니까 당연히 '나'를 안다고 생각하는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266P)...이라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니 다시 겸손해집니다. 숨겨진 '내'가 몇 겹으로 지층을 이루고 있을까요? 남은 삶을, 그 시간을 오롯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만 할애한다 해도 길지 않은 시간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에 대해 무지합니다.
프로이트는 심리학이라는 학문 분야의 새로운 길을 만든 사람입니다.
무의식의 심연을 파헤치고 거기서 주는 신호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생각하였습니다.
많은 정신 분석가들이 그를 추종하게 됩니다. 특히' 칼 융'과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아들러'가 그랬지요.
나중엔 그 둘 모두 프로이트를 등지게 되었지만 그로부터 받은 영향을 무시할 순 없겠습니다.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선구자가 필요하고 전수받아 발전시킬 이도 필요합니다.
결국 인간은 혼자서는 이 삶을 온전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 한계는 슬픈 운명이자 축복입니다.
축복임을 의식할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것일 텐데요.
그렇게 깨닫고 행동하는 삶으로 이어지고자 하는 의지를 끌어내기까지는 적잖은 노력이 필요하겠습니다.
늘 생각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갖고 살아야 하는가?
어떤 일을 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일에 나의 철학이 깃들어 있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이 어떤 가치를 품고 있는가.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입니다.
품은 생각이 순수하지 않고서는 바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한번 잘못된 선택의 방향은 삶의 지도를 바꿔나갑니다.
중간에 돌아오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삶은 걷잡을 수없이 추락하고 어두운 심연에 갇히게 되고 말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평생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된 걸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서 충돌하는 이드, 자아, 초자아에 대해 연구하며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대표 에너지를 '성적 욕구'와 '공격성'이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칼 융과 아들러가 그에게 등을 돌린 이유가 바로 이러한 그의 고집 때문입니다.
모든 문제를 이 두 가지 요인에서 찾으려는 그의 고집 말입니다.
실은, 모든 사람이 그렇지가 않지요.
누구에게나 성욕과 공격적 특성이 있긴 하지만 그건 사람 본성에 따라 아주 큰 차이를 나타냅니다.
프로이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한 연구의 큰 업적은 '자신'에 대한 연구, 그 바탕 위에 끌어올린 성과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끊임없는 자기 연구의 결과물로 자신의 집착을 찾아내고 그 안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고자 함이 엿보입니다.
하지만 객관적 잣대의 기준을 갖고 있진 못한 것 같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에너지 흐름은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미처 깨치지 못한 건 아닐까요?
이것이 인간의 한계인 것이지요.
그가 물꼬를 튼 심리학은 이후 다양한 형태로 발전합니다.
정신분석, 분석 심리, 개인 심리, 인지치료, 행동치료, 실존적 심리 치료, 게슈탈트 치료 등...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것은 한 가지 방법일 수 없겠습니다.
수많은 방법 중에서도 마주 앉은 상대에게 적합한 방법을 알아내는 지혜는 상담자의 능력이겠지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랑'입니다.
마주 앉은 상대를 품을 수 있는 온전한 그 '마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