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메이가 쓴 <우리의 인생의 겨울을 지날 때>를 읽고
누구나 한 번쯤 겨울을 겪는다. 어떤 이들은 겨울을 겪고 또 겪기를 반복한다.
윈터링이란 추운 계절을 살아내는 것이다. 겨울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거부당하거나, 대열에서 벗어나거나, 발전하는 데 실패하거나, 아웃사이더가 된 듯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인생의 휴한기이다.
식물과 동물은 겨울과 싸우지 않는다. 겨울이 오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며 여름에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삶을 영위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준비하고 순응한다. 그들은 겨울을 보내기 위해 놀라운 탈바꿈을 감행한다.
그러나 행복이 하나의 기술이라면, 슬픔 역시 그렇다. 아마도 학창 시절을 거치면서, 혹은 힘든 일들을 거치면서, 우리는 슬픔을 무시해야 한다고, 책가방 속에 슬픔을 쑤셔 박아놓고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때때로 그 또렷한 외침에 귀 기울이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윈터링이다. 슬픔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
- 우리의 인생의 겨울을 지날 때, 캐서린 메이
충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한 뇌의 현실 부정기를 지나 사별의 현실이 생생해질 무렵, 죽을만큼 힘들었다.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지만 밤이 되어 슬픔이 덮쳐오면 죽음을 생각하곤 했다. 슬픔도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고들 하지만 전혀 와 닿지 않았다. 내가 고통스러운 이유는 사별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한 집에서 살며 고양이 세 마리와 함께 나름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함께했던 동생이, 아직 기억 속에서 너무 생생하기만 한 동생의 존재가 이제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현실이 생생해질수록 마음은 현실을 더욱 격렬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받아들였다고 생각했지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 내가 익숙한 동생이 존재하는 과거의 삶과 동생을 잃은 현실의 삶이, 내가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서로 충돌하며 고통을 일으켰다.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이다. 놀랍게도 그를 깨닫자 놀랍게도 고통이 조금 잦아들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이야기한 사별 후 슬픔의 5단계에서 왜 두 번째가 부정(Denial)인지, 마지막 단계가 왜 수용(Acceptance)인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다섯 단계를 꼭 순서대로 통과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현실을 부정하는 단계는 충격으로 마비되었던 뇌가 서서히 제 기능을 찾으면서 꼭 겪게되는 단계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사별과 같은 인생의 겨울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겨울을 날 수 없다. 곰이 동면에 들고 식물들이 잎사귀를 떨구고 맨 가지로 겨울을 나듯이, 하던 일들을 멈추고 슬픔을 다루는 일에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수용은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니고, 현실을 100% 수용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리할 수 있어야 비로소 다시 사별 이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이전의 삶은 무너져 내렸음을, 내 삶이 나만의 삶 같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차지하는 부분이 크다는 것을, 내 삶에서 동생의 죽음과 함께 영영 사라져버린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사실 사별 9개월차가 다 되어가는 지금도, 현실을 100% 수용하지 못했다. 아직도 동생의 죽음을 상기할 때면 상실의 아픔 뿐 아니라 내게 익숙한 동생이 존재하는 세계와 동생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의 괴리감에서 오는 고통이 심장을 찌른다. 그래도 이 책 덕분에, 내 삶에 겨울이 왔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필명이 겨울밤인 이유기도 하다. 겨울, 그 중에서도 한 줄기 햇살조차 없는 한밤중에 삶을 빗대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삶을 노 저어 나가는데, 나만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강 한가운데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테고, 혹독한 겨울나기의 경험이 또 언젠가 찾아올 겨울을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
아직 나는 인생의 첫번째 겨울을 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