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광복절을 맞이하여 어느 시인의 삶을 담은 소설을 서평해보려고 한다. 이 소설은 대놓고 소설이 시작하기 전에 시인 백석에 대한 조선일보사의 1940년대 소개글을 담고 있지만 나는 온전히 주인공 ‘기행’의 삶을 따라가보고자 한다.
소설은 1957년의 러시아의 두 연인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벨라와 빅토르는 시인이다. 벨라는 스탈린그라드 출신의 평범한 중산층 집안에서 자랐고 빅토르는 당 간부인 아버지를 둔 특권계층이었다. 처음부터 폭발적인 사랑을 했던 두 사이였지만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오테펜(해빙)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기행을 저지르는 빅토르 때문에 벨라는 훗날 그와 헤어지게 된다.
아직 빅토르의 연인이었을 시절 벨라는 조선작가동맹에서 초청을 받아 1957년 6월에 비행기를 예약했다. 조선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벨라의 고향 또한 히틀러의 폭격으로 페허가 되었던 스탈린그라드였기에 청춘과 꿈이 있는 한 어떤 폐허도 가뭇없이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시인 기행은 동시를 쓰기 전까지는 알려지지 않은 소련문학 번역가였다. 조선 작가 동맹 아동 문학분과 2/4분기 작품 총화 회의에서 중앙당 문화예술부 문학과 지도 위원인 엄종석이 시인들의 작품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을 무렵, 회의에 늦은 기행에게 그의 1년 전 작품인 <기린>을 쓴 동기를 뜬금없이 발표하라고 시키더니 엄종석은 순수문학에 가까운 그의 작품을 두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맞지 않는다면서 자의적으로 그의 시를 비판한다.
1957년 벨라는 평양에 도착했다. 여러 시인과 소설가들, 통역가들, 번역가들을 만났는데 그 중에 기행도 속해 있었다. 기행은 벨라에게 자신의 육필노트를 선물했는데 벨라는 그 노트에 흥미를 갖는다. 기행이 그 노트는 오른쪽에서부터 읽어내려 가야 한다는 이유에 대해 결말부터 알게 되면 안 된다는 설명을 하자 그 설명이 엉뚱하고 재미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말부터 읽게 되듯이 인생을 거꾸로 살게 되면 어떨지에 대해 궁금해졌기 떄문이다.
1958년 기행은 평양의 친구 준이 사는 집으로 놀러간다. 마침 친구가 니콜라이 두보프의 <시도타(고아)>라는 시를 번역하는 와중에 출판사에서 이를 고독으로 바꾸는 게 어떻냐고 말하자, 기행은 낮에 있었던 총화회의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당에서 지도 위원으로 내려온 엄종석이 <송아지>라는 시를 두고 송아지의 이 고독한 심정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고독인지 되물었을 때의 어처구니 없음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의 고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준은 외로움을 나쁜 것이라 생각하며 늘 기쁘고 즐기고 벅찬 상태가 아니면 저주하고 증오하고 분노해야만 하는 북한 사회의 세태가 문제라 말한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지. ‘시바이’(연극,속임수의 일본어)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게 개조의 본질이 아닐까 싶어…… 자기를 속일 수 있다면 글을 쓰면 되는 거지.”
이 말에 기행은 자신이 왜 시를 다시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벌써 오래전부터,어쩌면 어린 시절의 놀라웠던 산천과 여우들과 붕어곰과 몇 편의 시로 남게 되면서, 혹은 통영까지 내려가서는 한 여인의 마음 하나 얻지 못하고 또 몇 편의 시만 매혹시킨 불행이란 흥성하고 눈부셨던 시절,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의 결과물이었다. 다시 시를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면 불행해지는 것쯤이야 두렵지 않아서.
얼마 지나지 않아 기행에게 답장으로 벨라의 시가 전달된다. 벨라의 우편봉투를 뜯던 중 문득 고당 선생이 정주에 머물던 기행을 평양으로 불러들였던 해방후 시기가 떠올랐다. 남쪽 인사들과 고당선생이 민주공화국을 만들면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하리라 믿었던, 모두가 모두의 선의를 믿었던 시절이었다. 해방 이후의 삶만 따지면 그 무렵이 기행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주는 여인을 만나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다. 통역관으로 능력도 인정받았고 경제 사정도 좋았다. 하지만 그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고 전쟁이 발발했다.
해방 8주년 열병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조국이 해방될 때 기행은 서른네 살이었다. 그 나이에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세상을 구원했다. 구세주는 못되더라도 새로 태어난 공화국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겠다는 열정은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지 않고도 모두가 땀흘려 일해 얻은 바를 즐거이 나누는 새 세상에 대한 꿈으로 그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그러나 정전 협정이 체결된 1953년 여름, 그는 폐허 위에서 다시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잔해에서 쓸만한 벽돌을 골라내는 법, 경사진 철로를 따라 밀차를 밀고 가는 법, 탈수를 피하는 법, 그리고 희망과 꿈없이 살아가는 법까지도. 십자가에서 절망을 온전히 받아들인 예수는 엘리 엘리 사박타니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절규했다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면 한 때 감리교회가 서있던 남산재 빈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나를 버리면 죽음과도 같은 이 깊은 골짜기를 지나 저 언덕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지(P.64)’
기행이 이 유별난 생각을 하는 이유는 중앙당에서 파견된 지도 그룹이 기행에 대한 자백위원회를 열었기 떄문이다. 이틀 전 상허와의 만남조차도 남한 출신 사람과의 대화도 내통으로 간주되었던 이유로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행은 마흔이 지날 때부터 만사가 허무해졌고 술이 많이 늘었다. 따져보니 인생은 전반적으로 실패였다. 원했던 삶이 있었는데 모두 이루지 못하였다.
상허는 죄가 없음에도 자백위원회에서 누명을 썼더랬다. 그와 함께 일하던 옥심이의 아버지도 누명을 썼는데, 옥심은 그것 때문에 마음이 매우 상해있었다. 그녀가 5살 때 아버지와 함께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는데, 그때 지평선 너머로부터 워낭 소리와 함께 온 카자흐인들과 만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빠는 늘 우리 남매들에게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생명의 법칙은 그렇지가 않다고 그러니 생명의 힘, 인간의 힘을 믿으라고.” 그러나 옥심은 그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며 울었다.
소련에 서구 문화가 도입되고 공포정치가 소강될 때 북한 체제는 오히려 개인 숭배로 회귀했다. 그 당시 러시아 유학생들이 망명하는 것을 막으려고 대사관에서 옥심을 인질로 잡았는데, 그녀의 약혼자는 망설이다가 도망쳤고 그녀의 아버지 또한 러시아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이유로 처형된다. 옥심도 그에 따라 권총으로 자살을 택한다.
이렇게 자백위원회가 열리기 전 심란해하는 기행에게 벨라는 ‘폐허를 응시하는 일이 시인의 일’이라고 말한다. 스탈린그라드가 불타 스러져가는 모습을 지켜본 벨라는 죽어가는 말들을 기억하는 것이 시인이 다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기행은 얼마 뒤 자백위원회에서 풀려나지만 좌천되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좌천이 반복되다가 나중에는 자백위원회에 불려다닌 끝에 간신히 어느 시골에 묻혀 살게 된다. 마지막에 ‘천불’이나 숲이 타들어 가는 모습을 보는 기행이 다시끔 무기력해진 가슴에 무엇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는 모습으로 작품은 막을 내린다.
우리는 광복절을 떠올리면 일반적으로 ‘빛을 회복함.’ 즉 일제 시대 때의 수난을 벗어던지고 마침내 독립했다는 그 사실을 축복하고 기억한다. 하지만 동시에 얼마나 처절하게 우리 민족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빛을 잃어버렸는지도 우리는 뼈져리게 기억해야 한다. 광복절은 기념과 동시에 성찰이 공존해야 할 날이다. 마침 이 소설은 해방 이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백석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위대했던 시인이 독재와 사상통제 때문에 메말라갔는지, 그리하여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순수문학을 하던 그가 “폐허를 바라보는 시인”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리 나라 현대사의 원로 학자인 강만길의 <고쳐 쓴 한국현대사>에 의하면 우리 근대사가 식민지 시대에서 곧장 분단시대로 넘어간 것에는 외세의 문제도 있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적 실패에도 있다고 한다. 이 실패에는 민족사회 전체가 1945년의 시점에서 민족해방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투철하지 않았다는 점,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국제 정치적 이해가 부족했던 점. 그리고 식민지 시대 말기 민족해방운동의 통일 전선 방향이 8.15 이후 계승되지 못한 점이 지적되었다. 나는 특히 첫 번째와 마지막 실패에 대해 우리가 더 깊이 고민해보았으면 좋겠다. ‘민족’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 시인 백석이 거쳤어야 했던 시인이라는 정체성의 박탈은 어찌보면 민족성의 박탈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