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위에 떠 있는 거대한 H자 금속체 안에 여섯 사람이 있다. 네 명의 우주비행사(미국인,일본인,영국인,이탈리아인)과 두 명의 우주 비행사(러시아인 두 명)이 열입곱개 모듈을 연결해 시속 1만 7500마일로 이동하는 우주정거장에 타고 있다. 외계문명이 본다면 아마도 의아할 것이다. 저것들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어디로 가지도 않고, 왜 멤돌기만 하는 거야? 모든 질문의 답은 지구다. 지구는 환희에 찬 연인의 얼굴이다. 그래서 이들은 지구가 잠들었다 깨어나고 자기 버릇에 푹 빠져 사는 모습을 물끄러미 본다. 지구는 이야기와 기쁨과 그리움을 잔뜩 안고서 어서 오기를 기다리는 어머니다.(p.8)
로만은 임무를 하면서 꼼꼼히 시간을 셈한다. 우주는 시간을 조각낸다. 그러니 일어나면 매일을 기록하라고, 지금은 새 날의 아침임을 되뇌라고 훈련 때 들었다. 이를 명심해야 한다. 지금은 새 날의 아침이다. 숀은 열 다섯 살 때 학교 수업에서 <시녀들>이라는 그림을 배웠다. 그림 속의 그림이라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자세히 보라고. 바로 여기를,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림 속에 있다. 이젤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그가 그리는 왕과 왕비는 그림 바깥에 그러니까 우리 자리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아는 까닭은 우리 바로 맞은편에 그려진 거울 속에 그들의 모습이 비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그들의 딸과 시녀들을 본다. 그림 제목이 <시녀들>인 것은 그래서다. 그러면 이 그림의 진짜 대상은 뭘까? 왕과 왕비인가, 딸인가,주변의 시녀들인가, 뒤편 문간에서 전갈을 전하려고 걸어오는 미지의 남자인가, 벨라스케스인가,아니면 왕과 왕비가 있는 자리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동시에 벨라스케스, 어린 공주 그리고 거울 속 거울 속 왕과 왕비의 시선을 받는 우리인가? 혹은 예술인가? 아니면 삶 그 자체인가? 아니면 선생님 말씀대로 무에 관한 그림일까? 그냥 몇사람과 거울이 있는 방에 지나지 않는다면? 선생님의 수업 내용은 동창인 아내가 요약해서 전해준 그림엽서에 적혀있었다.
치에의 어머니가 죽었다. 비행사들의 머릿속에는 엄마라는 단어가 멤돈다. 지구의 은총 없이 우리는 1초도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는 헤엄쳐 건널 수 없는 깊고 어두운 바다 위 배에 탄 선원들이다. 우주는 너무 경이로워서 중간이 없기에 지구에서처럼 한 사람의 죽음조차 미미하게 느껴진다. 그저 여러 번의 선회가 어디로도 가지 않으면서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아주 많은 고찰만이 있을 뿐이다.
어떨 때는 지구가 모든 것에 중심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태양 중심의 세월을 무효화해 태양과 행성들은 물론 전 우주까지 모든 게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던 성스럽고 거대한 지구의 시대로 돌아가는 게 더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구가 하찮고 작은 행성임을 깨닫고 우주 속 지구의 자리를 비로소 이해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멀리 지구와 멀어져야 한다.
어쩌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게 힘들어 문제인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자기 행성이 만물의 중심이라는 생각에서 탈피해 사실 그 생성이 무수히 많은 별이 사는 은하계 중 모든 면에서 보통인 태양계 속 보통인 행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힘든 일인지 모른다.
어쩌면 인간 문명도 하나의 인생 같다. 우리는 어린 시절 특별하게 키워져 더없이 평범해진다. 우리는 우리의 특별하지 않음을 깨닫고 순진한 마음에 덜컥 기뻐한다. 특별하지 않다면 적어도 혼자는 아닐테니까. 우리 세상과 같은 태양계가 아주 많이 존재하고 아주 많은 행성을 거느리고 있다면 적어도 한 곳에서는 틀림없이 생명체가 살 거것이다. 함께라는 느낌이 하찮은 우리 존재를 위로한다.
그러나 외계생명체와의 조우는 수십년째 살펴도 이뤄지지가 않은 탓에 인류는 자해와 허무주의에 빠져 닥치는 대로 깨부수는 10대 후반기에 접어든 게 아닐까. 버림 받은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을 까? 우리는 끝없이 자신에게 매혹되어 정신이 팔리고 자신을 사랑하고 미워하며 자신에 관한 신화와 숭배를 창조한다. 다른 선택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 끝에 넬은 종종 숀에게 우주비행사이면서 어떻게 신을 믿을 수 있냐고 묻는다. 하지만 션은 이토록 무한한 우주를 신이 아니면 누가 창조하겠느냐고 반문한다.
이 소설은 이처럼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정거장에서 겪는 일상 속 사소한 사건부터 우주라는 낯설고 압도적인 공간에서 느낄 수 밖에 없는 인간적인 나약함과 그로 인해 끊임없이 빠지게 되는 우주에 대한 단상을 고요하면서도 시적인 언어로 표현해 낸다. 그리고 그 단상들은 한 가지 주제로 귀결되는데, 그건 넬이 사색했듯이 인류가 광활하고 고독한 우주 속에서 자신들의 초라함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그 외로움을 나눌 다른 외계 문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좌절과 고독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결국 다시 말하면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압도적인 우주 앞에서는 먼지 가루가 되어버리는 이 시대에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느냐는 문제인데, 넬의 회의적인 태도와는 달리 숀은 그러한 유한한 인간에게 의미를 가져다 주는 것은 신이라고 말한다. 절대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을 때는 무엇이든 이유가 있지 않았겠는가?
이러한 소설의 사상과 맞아떨어지는 내용이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에 언급되어 있다. <팡세> 2장 72번, 인간의 불균형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모체인 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자기를 삼켜버리는 무한도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물의 원리나 궁극을 알 수 없는 영원한 절망 속에서 사물의 중간자에 가까운 어떤 것을 감지하는 것 외에 또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무한을 심사숙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은 마치 자신들과 자연 사이에 어떤 균형을 유지 하고 있기나 한듯이 무모하게 자연의 탐구에 몰입해 왔던 것이다.”라고 한다. 이는 넬이 사색한 바와 같이 인간의 한계에 절망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파스칼은 이에 굴하지 않고 넬의 모순을 숀처럼 신앙의 증명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숀의 아내가 엽서에 요약해준 선생님의 수업에 등장하는 그림인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한 고찰도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 첫 번째 챕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시녀들>은 16세기 고전주의의 ‘재현’ 개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재현은 그 자체의 모든 요소들로 스스로를 재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재현이 모으는 동시애 펼쳐놓는 이 분산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본질적인 공백이 뚜렷이 드러난다. 즉 재현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 달리 말하자면 재현과 닮은 사람 그리고 재현이 닮음으로만 비치는 사람이 사방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 주체 자체, 즉 동일 존재는 사라졌다. 그리고 재현은 얽매여 있던 이 이해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순수재현으로 주어질 수 있다.
푸코의 <시녀들> 비평을 참고하자면, 이 소설의 주제, 즉 이 세상에 의미는 존재하는가? 이 압도적으로 거대한 세계에 우리 존재가 발붙힐 곳은 있는가에 대해서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재현은 원형인 자연으로부터 시작하여 의미를 이끌어내고 이는 다시 언어의 탄생으로 이어져 문자로 완성된다. 그리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이러한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류 문명이 문자를 쓴다는 것은 더이상 어떤 것의 불완전한 복제품으로서의 지식이 아닌 인간만의 고유한 의미를 응용하여 만들어낼 수 있다는 뜻이므로 재현이 어느 순간 모든 각도에서 재현으로 이루어지는 벨라스케스의 그림이 어느 순간 순수재현으로 바뀌는 것도 결국 인류는 이 무한한 우주를 창조해낼 수 없더라도 자신만의 소우주를 창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