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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평집

프랑켄슈타인적 인간본성론

by 최시헌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 본성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두 가지 딜레마를 제기한다. 첫째는 인간을 포함한 생물종의 역사는 목적론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이 이러한 생물학적 본성에 내재한 윤리적 전제들을 놓고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딜레마가 말하는 것은 목적성 없는 윤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목적, 진화와 생존을 따르는 윤리가 필요하다는 것이고 이것만이 유일한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어떠한 ‘의미'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 메리 미즐리는 <짐승과 인간>이라는 책에서 에드워드 윌슨을 두고 과학 자체에 대한 찬성과 반대 양가의 감정을 불러왔음을 지적하면서 학계의 제국주의자로서 유전적 결정론(환원론)을 지지한 이른바 생물학적 대처주의자라고 비판한다. 즉 진화란 본질적으로 이기적 개체의 경쟁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비윤리적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자연선택은 신이나 섭리로 바꿔도 달라지지 않는다. 정작 그들은 신이나 섭리를 부정하면서 말이다.

미즐리는 구체적으로 먼저 사회생물학의 무신론적인 환원론을 지적한다. 가령 개체가 적응을 한다라는 말은 어떠한 환경에 자신을 적합하게 만들어가는 것인데 그 적응을 해야 하는 환경은 어디서 유래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설계자 없는 진화론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이기주의가 진화의 규칙이라는 점에 관하여 적응에 적합하다는 것, 즉 좋음(good)에 대하여 묻는다. 진화의 요인은 한 가지가 될 수 없으며 이기주의라는 규칙성은 다른 의미의 목적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이 두 가지 입장은 사실과 가치, 목적과 수단 사이의 거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단지 이것이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논의가 되었을 뿐이다. 가령 진화는 하나의 현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 자체로 가치가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가치를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와 같은 명제가 그러하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는 헌법에 성문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평등함은 동일함과 다르다. 평등함은 인간이 정의를 내린 것이고 동일함은 인위적으로 정의 내려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러한 것이다.

여기서 동일함은 가치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의를 내리는 행위는 언어로부터 언어를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화는 분명 하나의 현상이다. 그렇기에 진화는 사실이지 가치가 될 수 없다. 이름이 붙여지기도 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일어난 현상에 대한 기록에 이름이 붙여진 후에야 완성된다. 그렇기에 목적론적이다. 어떤 목적이어야 되는가는 바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몫이다.

사실 에드워드 윌슨이 놓친 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인간이 공간으로서는 자연 속에서 살지라도 시간적으로는 역사 속에 산다는 점을 놓친 것이다. 자연은 우리가 이름을 붙이기도 전부터 존재했지만 우리는 오직 기록된 것만 ‘역사’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이긴 하다. 그렇다고 동물과 반대되는 그 무엇도 아니다. 하지만 동물에 속한 것이지 인간종으로서 지니는 특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른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이러한 논의에 어울리는 문학 작품으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만한 것이 없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어릴 적부터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이 어머니와 동생, 친구의 죽음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에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었으나 그 외관적 흉측함에 자신의 창조물을 혐오했고 외로워하는 프랑켄슈타인에게 짝을 만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증오심에 그를 죽이려다가 도리어 그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실제 프랑켄슈타인의 수기를 보면 의외로 괴물 같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는 순수하고 마음이 따뜻한 존재였다. 실험실에서 태어난 프랑켄슈타인은 숲 속에 사는 어느 단란한 가족과 살면서 사랑과 다정함이라는 감정과 태도를 느끼게 되고 그들로부터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 주변의 사물과 감정 등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세상을 알아갔다. 그러나 가족이 있는 인간들과는 달리 곁에 자신만의 인연이 없었던 프랑켄슈타인은 마치 실낙원에서 신에게 버림받은 사탄 루시퍼와도 같이 스스로를 비관할 정도였다. 창조주였던 빅토르가 그를 혐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빅토르는 과학을 통해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었지만 그의 외관만 보고 편견을 가졌을 뿐 프랑켄슈타인만의 인간성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치 진화론자들이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도 우생학을 퍼뜨리고 인종차별을 부추긴 것처럼 말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면이다. 막스 베버의 <관료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근대적인 직무 충실의 특수한 성격에서 결정적적인 점은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목적을 향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목적 뒤에는 목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미화하는 문화가치이념이 존재한다.” p.11

오늘날 신자유주의 포퓰리즘은 사회생물학의 환원론과 유사하다. 적자생존이 사회의 유일한 목적이다. 이곳에는 사실과 가치의 구별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 사회생물학은 과학이 아니라 도그마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고 종교가 되고 정치가 되었다. 이제는 과학적으로 현상을 사실로 합리화하려는 노력조차도 사라지고 사실이라는 개념 자체를 무효화하려는 상황에 이르렀다. 진화론이 사실에서 가치로 바뀌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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