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서평집

<중세의 가을>_요한 하위징아 서평

by 최시헌

중세 유럽의 사회는 강렬한 대조를 이루는 사회였다. 계층,예술, 빛과 어둠, 고요함과 소란스러움이 공존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격해지기 쉬운 감정을 지녔으며 눈물이 흔했고 예민한 성향이었다. 대중의 마음에는 암투가 판치는 정치구조조차 민요나 기사 이야기의 이념으로 승화되었다.

그들에게 정치란, 당파 싸움 이상의 것이었으며 증오와 질투, 우정과 낭만이 얽혀있는 하나의 드라마였다. 그 시대는 희곡의 시대였으며 현실이 곧 무대였다. 심지어는 종교적 의미의 죄악이 아니라 적의 행위를 죄악으로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가령, 몽스의 백성들이 도적 두목이 갈가리 찢기는 것을 보려고 그를 사들이는 잔혹성을 보인 사례가 있다. 이들은 지옥의 공포와 순진한 어린 아이와도 같은 장난 사이를 오고 갔으며 극에서 극에 이르는 사회의 면면을 보였다.

한편, 흔히들 중세하면 떠올리는 가톨릭의 이미지처럼 이 시대는 매우 종교적이기도 하였다. 이 책에서 다루는 시대는 14,15세기의 중세의 쇠퇴기를 지나고 있는 부르고뉴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미 지나간 봉건시대에서 죄악으로 여겼던 교만의 죄에 이어 새로운 시대에는 탐욕의 죄를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겼다.

교만은 본래 상징적이고 신학적인 죄로서 성서에서 근본적인 죄로 언급하고 있으며 교회의 대부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를 만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러나 13세기 이후로부터는 탐욕을 새로운 만악의 근원으로 여겼다고 한다. 탐욕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지상의 물질적인 죄악에 가깝다. 그러나 고리대금업과 같이 화폐유통을 통해 부를 불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부자들이 횡포를 부리는 시대가 찾아왔고, 가난한 이들은 보다 더 고통받았다. 그로인해 대중들 사이에서는 소위 벼락부자들에 대한 분노가 쌓여만 갔다.

참으로 냉혹한 시대였다. 대중들은 물론이거니와 귀족들이라고 안전하기만 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불의한 법과 제도,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신분의 탐욕은 기존에 중세사회가 가졌던 낭만과 같은 것들을 천천히 메마르게 만들었다.

“참으로 악한 세계였다. (…) 교회는 다투었으며 설교자,교사,시인은 설득하고 경고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p.45.

신분제 사회였던만큼 중세 사회의 계층사호 개념은 단순히 부에 의한 차등이 아니었다. 이는 중세 신학과 정치사상이 융합된 하나의 세게관이었다. 이는 각각 에스타(세속민)과 오르도(신이 바란 현실:사제,수도회,기사단)으로 나뉘었다. 현실적인 역할로서는 평민이 노동을 통한 생산을 하고 성직이 신앙의 의무를 수행하고 귀족이 덕과 정의를 유지했다. 이와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 부르주아가 멸시를 당한 이유는 그들이 이룩한 경제와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렇게 이상적이지 못했다. 귀족들이 평민을 향해 가진 태도는 기만적이었기 떄문이다. 그들 시대에 평등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평등한 인간이다.(omnes naunque homines natura aequeles sumus).” 이는 초대 교부들의 유산이었지만 여기서 말하는 평등은 살아있을 떄의 평등이 아닌 죽은 뒤 신 앞에서 누리는 평등을 말한다. 귀족들은 평민을 가엾이 여기는 것을 자신들의 미덕으로 여기면서도 그들은 무지몽매하다면서 멸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평민들의 가난이 안타깝다고 말하면서도 제대로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 해결하려 들지는 않았다.

이러하기에 대중은 내세의 평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신앙의 포화상태를 낳았다. 모든 이미지, 세상에서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신앙의 관념과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실제 교회 개혁론자들이 교회의 쇄신을 두고 비판한 것도 교회의 이단성이라기보다도 지나친 신앙의 짐에 있었다.

더많은 성물, 더많은 미사, 더많은 찬양 등등, 당시의 신앙은 도덕적인 광신에 가까웠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처음에는 이렇게 양적인 문제였지만 이것도 지나쳐지자 질적으로 이단성이나 미신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성모 마리아 숭배나 성체를 예수 자체로 여기는 등의 문제들이다. 심지어는 성인숭배나 수호천사 숭배마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어느 순간 종교적인 것과 세속저인 것의 경계가 붕괴되기 시작하자 중세의 기독교는 힘을 잃기 시작했다. 이를 테면 상징주의는 중세 사상에 생명을 불어넣은 숨결이다. 이떄 상징주의는 모든 사물을 깊은 의미 연관 속에서 파악하여 영원한 것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보려는 욕구의 경계를 유동적으로 변화시켜 규정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일반성으로 회귀하면서 초관념론과 같은 원시적 정신활동이 당대의 신학이었다보니 학문적으로도 많은 성취를 이루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렇게 보면 중세는 자본이 고개를 들면서 신앙이 힘을 잃고 붕괴하면서 새 시대의 거름이 되었던 것 같다. 고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원시적이라고까지 느껴질 정도의 중세의 신앙이 메마른 것은 서구 사회에 실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마치 낙엽이 떨어지듯이.

짧아지는 가을, 혹자는 종말이 다가온다고들 한다. 핵전쟁, 기후위기, 질병 등등 가을은 쇠퇴의 계절, 겨울을 맞이하기에 앞서 지난 해를 성찰하고 자신을 죽음앞에 준비시켜야 할 시기이다. 중세의 가을은 땅거미가 지고 있었으며 격렬한 역동이 있었으나 그 화려한 불꽃은 지나치게 빠르게 타들어 식고 말았다.

참회하기보다는 욕망하던 시대였다.(사실 어느 시대가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대성당들의 시대였고 심지어는 과잉신앙의 시대였음에도 말이다. 오늘날 짧아지는 가을을 보며 중세의 가을을 떠올린다. 중세의 쇠퇴기와 오늘날의 시대는 마치 나선 모양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봉건을 벗어나 자본주의의 씨앗이 발아하던 시대에서 현재는 사이비 신앙과 정치를 통한 포퓰리즘과 신자유주의의 포화상태, 지나친 연결들과 자본과 경쟁에 대한 숭배가 연극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중세의 뜨겁고 순수한 감정에 대적해 차갑고 기계적인 근현대의 합리성이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지금은 숨막히는 이성의 압제에서 터져나오는 감정들이 혐오와 갈등의 형태로 고삐가 풀려 날뛰는 듯하다. 이성이 사라진 시대, 이성을 회복하자, 반이성주의를 타파하자와 같은 목소리들이 민주주의 시대의 구원자로 자처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해답이 아니라고 본다. 중세의 민중들이 흘렸던 순수한 영혼의 눈물을, 활력과 치유의 신앙만이 현재 상처받은 대중의 마음을 회복하고 이미 신뢰를 잃은 민주주의와 파멸적인 신자유주의를 이겨낼 수 있다고 본다.

이미 많은 시대가 흐른 오늘날, 많이 서툴렀던 중세의 기독교와 오늘날의 기독교는 차원이 다르다. 많은 쇄신과 반성이 있었고 분파도 있었고 논쟁도 많았다. 이제는 더욱 성숙하게 사회를 이끌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신정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린 이제 세속종교와는 작별을 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의 빛과 어둠의 이중주는 다시 울릴 것인가? 기존의 시대는 분명 가을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 나는 아직 우리의 시대에 봄조차도 오지 않았노라고. 아직 겨울을 버틸 기회가 인류에게는 남아있다고. 그러니 참회하자고 말하고 싶다. 정확히는 지난 시대들을 축복하자고 말이다.

단테도 이렇게 <향연>에서 노래하고 있다.

“나중에 인생의 넷째 부분에서는 하느님과 다시 결합하며 자신을 기다리는 종말을 관조하며 지나간 과거를 축복하네”.<향연> 단테, 셋쨰 칸초네 <시 82편(RImeLXX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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