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전들을 통한 자아 성찰
‘Der vogel Kampft sich aus dem Ei.(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유명한 격언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사는 곳이 물 속임을 아는 유일한 물고기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실제 어느 쪽이 바다고 어느 쪽이 육지인가? 황당한 질문이지만 이는 현대인이 봉착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세속화가 정점에 다다른 오늘날, 오히려 역으로 세속적인 것이 토템화되고 있다. 에우튀프론의 딜레마가 그대로 이어진다. 우리는 스스로를 소모하다시피 자본의 제단에 바치고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 자본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우리가 사회적으로 유용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유능한 인간인 우리가 자본을 사랑하는가?
이 질문은 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 우리는 자본을 수단으로써 개발하였다. 애초에 사랑과 같이 그 자체로서 목적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곳이 물 속인지, 땅 위 인지, 신성한 곳인지, 세속화된 곳인지 헷갈려한다.
그리고 나는 청년기의 초반 3,4년간을 방황하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질문해 왔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가르치려 들었지 내가 진정 어디에 있고 내가 숨 쉬는 것이 영혼인지 아니면 육적인 욕망에 불과한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방황 중에 무기력한 사이에 나를 둘러싼 서사를 자기들끼리 만들었다.
나는 태어났는가? 적어도 더 이상 둥지에서 안온한 평화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나는 알에서 나왔으되 나의 감각 중 어느 하나도 활성화되지는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 글은 ‘니코스 카잔차키스’,’ 톨스토이’,’ 사도바오로’의 평전들을 통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실존의 지도를 개척해 나가는 방법을 알아볼 것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은 스스로의 인생을 꿰뚫는 철학을 시적 표현으로 아름답게 표현해 낸 자화상이다. 물론 그의 어린 시절이나 사춘기의 질풍노도도 충분히 인상적이지만 나는 그가 청년기에 대학을 졸업한 후 유럽 순례를 떠나고 다시 크레타 섬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러시아에서 막 돌아온 카잔차키스가 사회주의에 심취해 있을 무렵 막상 크레타에서 자리를 자리를 못할 때 갈탄 채굴을 하던 곳에서 늙은 광부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났다. 그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 카잔차키스의 ‘구루’라고 한다. 현대 사회의 냉철한 이성이 보기에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조르바의 야수적인 본능이 그를 매료시킨 것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세계의 파멸적인 위기에 압도된 카잔차키스는 작가로서 중대한 사명감에 빠졌다. 그리고 그 파멸의 틈은 골짜기가 되어 갔다. 인간의 기성도덕과 종교가 이미 색을 바라가고 있던 시대였다. 그렇게 구원을 창조해 내야 하는 전환기에 카잔차키스는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분투 중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야 그는 투쟁으로서의 구원이 자신이 창조하고 싶은 이 세계의 정체성임을 깨닫고 크레타의 산을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르바에게서 느꼈던 근원적인 활력을 다시 발견함으로써 어떠한 영감을 얻는다. 그러나 조르바는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된 카잔차키스는 그의 문학을 통해 조르바를 부활시키기로 결심한다. 조르바는 평소에 “나는 마치 불멸하는 존재처럼 행동하죠”라고 말했다. 그는 신에게나 어울리는 교만을 저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가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한 것도 마치 신이 그러하듯 그의 피조물을, 그 모두를 차별 없이 사랑함으로써 신과 합일되라는 말씀이 아니었던가?
아담은 죽었고, 예수는 부활한 까닭은 분명하다. 아담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위대한 신이 되고자 했고 예수는 우리 모두를 위해 가장 낮은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를 위하여’. 이는 어떻게 이루는가? 내가 나를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함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이는 톨스토이의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1장, 악을 악으로 갚지 마라에서 알 수 있다. 톨스토이는 마태복음 5장 39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마라’라는 말씀을 묵상한다.
오늘날의 종교는 자본주의에 편승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희생(소모)하여라. 주 하나님(자본)을 위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둘러대며라는 말씀에서 자신의 삶을 남에게 일부로 빼앗기거나 사서 고생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다만 악을 대적하기보다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선을 행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가장 낮은 자가 되어 모두를 사랑하는 행위에 희생이 필요한 이유는 세상은, 이 악한 세상은 그러한 겸허함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그 사악한 뱀은 전쟁과 탐욕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 즉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적함으로써 자본주의에 종속된다.
“악을 대적하지 말고 그러한 악한 세상조차 가엾이 여겨라. 나는 그들이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용서받기를 원한다.”이것이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메시지가 아닐까? 이는 사도 바오로의 종말론으로 이어진다. 바오로는 신의 구원이 부활할 사람들을 선택해서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영적인 땅에 하늘의 삶을 이식하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마지막 날은 언제 올지 모르고, 우리 모두가 죄를 용서받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교회는 ‘노아의 방주’가 되어야 한다. 최대한 많은 영혼과 함께. 그리고 바오로가 가장 경계했던 죄악은 다름 아닌 우상 숭배였다.
종교마저 자본을 숭배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지극히 명백하다. 인간을 소모하다 못해 말려 죽이는 세속의 합리성이 아니라, 모두에게서 가장 낮은 자가 되어 사랑을 나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어리석음이다. 나는 내가 숨 쉬는 공기가 흐르는 물속의 불안이 아니라 불어오는 영혼의 숨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