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서평집

<세계는 계속된다>(허구와 진실 속에서)

by 최시헌

‘남을 가치가 없는 곳’을 떠나기로 했다. 여행가방을 챙겨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 이 우주의 황량한 교차로. 사람이 존재할 수 없는 곳. ‘떠나, 지금 당장 떠나, 그리고 돌아보지 마.’ 그러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이쪽인지 저쪽인지 현실의 상식에 휘둘린다. 그러나 이 비일상적 환경, 이 길에서만은 지극히 실용적인 지식이 우리가 선택한 방향이 좋았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감각이 바로 서 있는 헤맴이라고 알려진 상태이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우리는 가장 위대한 약속의 땅, 평온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가장 먼 곳을 바라보나니. 그런 나 이토록 희망적인 선언 뒤에는 그의 광인과도 같은 존재마저도 희미해져 가는 험난한 여정만이 있었고, 그는 세계에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그러던 언젠가, 그와 닮은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 참을 깨달은 그는 스스로 미로에 갇히게 된다. 그들을 피하기 위해. 그러나 그곳에서 잠이든 그는 이 차갑고 슬픈 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외부의 도움 없이 자기 뜻대로 모든 것에 도박을 걸어 날려버렸다는 사실을 잊고 싶어 한다. 신들과 이상을 다 좇아버리고 죽였다. 아니, 역사는 끝나지 않았고 그 무엇도 끝나지 않는다. 그저 무언가는 계속되고 무언가는 살아남는다. 우리는 여전히 예술작품을 생산하지만 이젠 그 방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도 않고 희망을 주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태초의 이야기를 완전히 아는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오류 위에 오류를 쌓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냉소엗 위안이 있다면 창조되고 존재하는 모든 현상 안에서 느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글들은 2025 노벨문학상 수상자 크러스너호르 커이 라슬로가 <세계는 계속된다>라는 작품에 써놓은 단상들이다. 한국에서 테러를 못하는 이유는 외국인 노동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농담처럼 오늘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일상을 떠난 사람들은 신을 죽인 시대에 갇힌다. 그들은 태초의 가르침을 망각한 이들의 후손이기에 끝나지 않은 역사 속에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지 못한다.

언뜻 보면 상투적인 표현인 것 같기도 하고 일기나 메모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만든 방랑자의 우화는 진실을 담고 있다. 우리를 가나안으로 이끌 예언은 아닐지언정 그는 일상 속에 파묻혀 죽어가는 혁명의 씨앗들을 적나라하게 나타낸 것이다. 사실 가브리엘 마르쿠스의 <허구의 철학>에 의하면 애초에 허구적 대상은 없다. 허구는 우리에게 우리 삶의 장면으로서 감각적 직관에 단박에 나타나는 틀을 벗어난 것에 대한 묘사이다.

따라서 허구는 추상화된 인간의 인식체계 내 어디서든 존재한다. 다시 말해 정신의존적인 것이 허구다. 그리하여 꾸며내기란 초월하기다. 감각 이상을 인지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허구는 그 자체로 실재한다. 해석이라는 영역에서 허구는 진실일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개소리에 대하여>를 쓴 해리 프랭크퍼트는 <진실에 대하여:개소리가 난무하는 사회>라는 그의 신작에서 진실은 ‘troth 진심’이라는 단어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진실은 ‘진심’이라는 믿음에 의해 형성된다. 그러나 냉소적인 해리는 오늘날의 사회는 진실을 유용하게 쓰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허구가 진실이 될 가능성을 지닌다면 우리는 진심, 즉 믿음을 통해 ‘개소리’와 ‘허구’를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라슬로의 우화대로 우리는 ‘진심’을 망각하고 진실로서의 허구를 기각한 채 서로에게 개소리만을 늘어놓고 있다. 역사는 계속된다. 그러나 신화는 아직 새로 태어나지 못한다. 라슬로가 마지막으로 남긴 힌트는 태초부터 우리에게 심어진 ‘느낌’이다. 우리에게 영겁을 거쳐 이어진 숨결, 차가운 이 우주조차 죽이지 못한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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