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가브리엘의 '도덕적 사실'에 대한 성찰
그야말로 어두운 시대다. 마르쿠스 가브리엘, 21 세기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는 그렇게 단언한다. 극우정치의 창궐,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의 구조적 위험,지정학적 갈등등을 예로 들면서.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럼에도 동성애나 특정 종교가 범죄가 아니게 되었다든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헌법에 중요한 도덕적 변화가 생겨났다든지와 같은 사례를 들면서 도덕은 진보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위기에도 기존의 도덕은 진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브리엘은 말한다. 도덕이 시대를 이끌어가지 않으면 인류는 홀로코스트 깉은 비극을 다시 겪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마르쿠스는 새로운 ‘계몽’을 제언한다.
그는 도덕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날 널리 퍼진 문화 상대주의의 패권적 경향,탈근대의 다원주의, 그리고 가치 허무주의등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냉소적 주장들을 총체적으로 비판한다. 도덕적 사실, 즉 도덕적 가치가 주어져 있는 사실 그 자체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선이든 악이든 중립이든,그 현상을 맞이했을 때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도덕적 사실이다.(ex.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면 안된다.)
이와 더불어 그는 윤리적 사실이 모든 도덕, 심지어는 종교보다도 우선하는 이성적 귀결이라고 본다. 가령 서구 기독교의 절대적 윤리인 예수의 계명도 구원을 위해서라면 가족보다도 자신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말세적 극단주의를 가진다는 예가 그렇다.
그러나 이는 결국 전혀 새로운 내용이나 진보 같은 게 아니다. 물론 탈근대나, 허무주의, 패권적인 문화 상대주의의 폐해를 지적한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브리엘 그 자신도 인용하듯이 이 ‘도덕적 사실’은 보편적 이성에 의해 호소되고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을 반복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도덕적 사실 그 자체는 존재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이 컴퓨터도 아니고 그러한 ‘사실’을 안다고 그대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계몽주의와 칸트가 이미 범한 오류도 그것이다. 인간은 이성만이 아닌 욕망과 정념을 가지고 있다. 도덕은 겨우 학술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고백했듯이 인간은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은 언제나 영적인 투쟁이었다. 그것은 이성과 욕망간의 갈등 정도가 아니였다. 나라는 자아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동물의 본능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자신의 실존을 내건 ‘죽느냐, 사느냐’의 햄릿적 독백이었다. 그러니 도덕은 진보는커녕 변화조차 한 적도 없다. 인간이 동물종이 아닌 프로그래밍이 된 사이보그로 진화하지 않는 한 도덕은 사실만 나열한 영역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윤리학이 종교보다 우선한다는 가브리엘의 주장도 적절치 않다. 당장 기독교의 기나긴 신학의 역사만 보아도 이성과 정념의 화해를 얼마나 많이 시도했던가? 기독교는 단순한 미신 같은 게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비롯한 인류에게 심오한 보편원칙을 제시한 종교들은 논리를 초월한 최전선에 있었다.
자아는 정신분석학에서도 나와 있듯이 인간이라는 동물이 아닌 이름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낸다. 인문학이라고 불리어왔던 것들의 간단하지만 치명적인 오류도 인간이라는 동물을 연구했지 자아를 고찰하는 데에 소홀했다는 데 있다.
자아는 이성과 정념을 초월한 복잡한 존재이다. 여기서 초월은 물질이나, 관념, 육체나 정신, 시간이나 공간,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의 총체로서 베르그송의 말을 빌리자면 개방적 영혼으로서 이 모든 것의 총체, 거시적인 인류의 표상임과 동시에 폐쇄적 영혼으로서 이 모든 것에 부분적으로 한계지어져 있는 나 자신의 삶이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삶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에 따라서 보다 본질적으로 영적 투쟁의 전선이 넓어지는지가 결정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