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길거리에서 시도 때도 없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가 들린 적이 있었다. 바로 자동차가 후진할 때 들리는 멜로디였다. 고급 승용차도, 이삿짐 트럭도 심지어 새벽녘 쓰레기차에서도 후진할 때에는 항상 '띠라리라 띠라리라리~'가 울렸다. 자동차 뒷부분에서 흘러나온 그 멜로디는 배기가스의 변신이었고 차갑기만 한 '철갑'의 따스한 배려였다. "조심하세요, 저 잠깐 뒤로 가요~" 자동차 메이커의 담합이었을까. 우연이라 하기에는 유행가처럼 빨리 퍼진 그 멜로디는, 한편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주거공간으로 아파트가 대세이기 전인 7~80년대에는 고만고만한 크기의 집들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 골목 어귀에 들어서면 꼭 어느 집에선가 귀에 익은 피아노곡이 울렸다. 물론 밥때가 되면 음식 냄새가 나기도 했지만 그것은 지나가는 이의 허기를 자극할 뿐, 울려 퍼지는 피아노 곡은 듣는 이의 감성을 달랬다. 서툴긴 하지만 또박또박 눌린 각각의 음들은, 투박하지만 깊은 맛을 품고 있는 우리네 밥상처럼 진솔했다.
그때의 피아노 곡도 그때 먹었던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만큼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 그것은 '엘리제를 위하여', '소녀의 기도' 또는 '은파(silvery wave)'중 하나였다. 피아노를 배울 때 초보를 지나 중급과정의 길목에서 맞닥뜨리는 곡으로, 양손이 옥타브를 넘나들며 분주한 움직임이 요구되는 귀에 익은 멜로디다. 이는 어린 시절 누구나 들어봤음직한 '피아노 3대 명곡'이다. 집안에 누나나 여동생이 있다면 으레 피아노를 배웠겠고, 연습한 보람이나 실력의 뽐냄이 가능한 소품이었기에 주변의 우리들까지 친숙한 곡이 되었다. 자주 듣게 되면 귀에 익게 되고 공감이 일면서 어느덧 그 나이의 감성이 곡에 스며드는 것이다. 디지털 음향이 범람한 지금에 와서도 3대 명곡은 화석화된 우리의 감성을 지난날의 말랑함으로 치유한다.
그때는 그만큼 적었다. 부족했다. 우리를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은 흑백 TV와 라디오, 큰맘먹고 가는 개봉관 영화 그리고 가끔가다 전국을 순회하던 '동춘서커스단'의 공연까지였다. 하지만 그것들은 오락에 가까웠을 뿐 우리의 서정을 달래지는 못하였으니, 지금의 우리 또래는 당시의 몇 안되는 고급(?) 문화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서 좁으면 깊어진다고 얼마 안 되었던 서정적 경험에 어릴 적 감성을 모두 저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씩 꺼내볼 수 있는 보고(寶庫)가 될 줄이야.
풍요 속의 빈곤이라 했던가. 지금은 기술의 발달과 물질의 풍요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차고 넘친다. 하지만 부족했기에 오히려 집약할 수 있었던 지난날의 감성쌓기 작업은 어렵다고 봐야겠다. 문화마저도 상업화에 점령당해 다양하게 분화된 콘텐츠를 즐기기엔 우리의 감성이 바닥나고 있다. 오히려 모두 닫아두고 쉼이 필요할 듯하다. 지하철에서의 스마트폰도, 책상 위의 인터넷도, 하다못해 광역버스 안의 TV '타요타요'도... 음악, 미술, 도서 등이 모두 디지털화되어 액정 속에 들어가 있는 지금 우리는 단말기만을 통한 문화의 소비자일 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음한음 어렵사리 곡을 쳐내며 어설프게나마 문화의 참여자도 되었던 지난날, '풍요 속의 빈곤'이 아닌 '빈곤 속의 풍요'였던 그때의 역설이 그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