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낭자했다. 늘 나와 함께하고 그만큼 각별했던 노트북 위로 곧 죽음을 부르는 뻘건, 아니 하얀 액체가 흩뿌려졌다. 사람에게는 완전한 영양의 보고이며 그 색깔만큼 선(善)했던 우유가, 실수로 잔을 들려다 치는 바람에 다 쏟아져 내 몸이 아닌 키보드 틈새로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순간 색깔만 하얗지 그것은, 나보다 스마트하고 나를 위해 존재해주던 노트북의 사망을 의미하는 '피'였다.
노트북을 살려야 한다. 응급처치가 필요했다. 바로 키보드를 뒤집었다. 중력의 힘을 빌려 한 방울이라도 더 키보드 틈새로 우유를 빼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노트북을 붙잡고 허공에다 탈탈 털며 보다 적극적인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숨이 꼴까닥 넘어가려는 환자에게 인공호흡을 하는 심정으로, 팔에는 힘을 주고 좀 더 빨리 좀 더 세게 털었다. 한 여름의 더위가 그런 수고를 땀방울로 증명해주었다. 우유 한 방울에 땀 한 방울이면 어떠랴, 열 방울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단 마음으로 계속해서 털었다. 죽음의 액체가 메인보드를 해치고 하드웨어까지 침투하기 전에, "모두 뽑아내야만 해!", 나는 절규했다.
지난겨울, 붙박이 PC에 불편을 느껴 노트북이 있었으면 했다. 최신 기종으로 즐비한 진열대에서는 그 가벼움과 슬림함으로 데스크톱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외침이 들렸다. 그 외침에 눌렸는지, 아님 오만 원씩 십 년짜리 적금 들면 그 이자만으로도 살 수 있다는 '금융공학'에 홀렸는지 선뜻 사고야 말았다. 이미 구입했으니 '주인은 나, 너는 현대판 지니(Genie), 내가 원하는 정보를 마음껏 보여주렴~'하는 기대로 마우스패드를 문질렀다. 언제 어디서나 그 간편한 휴대성을 자랑하는 마술램프는 나에게 세상의 모든 것, 정보의 바다로 안내했다.
그런 지니를 살려야 한다. 나는 아직 알고 싶은 것이 많다. 보고 싶은 것도 많다. 너 없이 어느 창으로 세상을 볼까. 응급조치를 끝내고 전원을 켜니 다행히 작동이 됐다. 이 상황이 궁금하여 인터넷 검색을 하는데 갑자기 키보드 몇 개가 먹통이 되더니, '우유의 유당이 굳어지면 끝내 속수무책...'을 마지막으로 모니터에 남기며 지니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전원까지 나가다니 혼수상태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나, 서둘렀다. 곧바로 지니를 파우치로 둘러싸고 택시를 탔다. 근처 응급실, 아니 서비스센터로 향했다. 6시 마감까지 20분밖에 안 남았다. 시간이 없다. 빨리 입원, 아니 접수를 해야 한다.
마감 5분 전에 간신히 접수를 마치고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마치 수술실에 환자를 들여보내고 기다리고 있는 보호자 같았다. 마감이 지난 시간이라 주변도 적막했다. 몇 분의 초조함이 흐른 뒤 저쪽 수리실에서 마침내 나를 부르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따라 들어가면서 표정을 살폈다. 어떻게, 수술이 잘 끝났나. 상태는 어떤지... 안으로 들어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역시나 수술대 위의 지니는 배를 가르고 장기가 해체된 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기사는 의사인 양 이런 유의 환자를 많이 다뤄본 듯한 차분한 말투로 담담히 설명해주었다.
"일단 과실로 인해 무상은 안되고요, 더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메인보드까지는 다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사도 자신이 의사로 착각했나, '무상'이란 말을 '보험'으로 바꾸기만 하면 환자의 상태를 얘기하는 것과 흡사했다. 다시 잠깐 나가서 기다리란 말에 노트북 걱정에 대한 배려로 상태부터 미리 설명해준 것 같았다. 기사에게 신뢰가 갔다. 다시 얼마 후 기사의 호출에 수리실로 갔다. 지니는 이미 조립되어 말끔해졌고 그의 마지막 장면 '유당이 굳어지면...'의 사이트를 열어놓은 채로 정신이 돌아왔다. '살아났구나!'
"운이 좋았네요. 메인보드는 이상 없고요, 키보드 자판이 상했는데 마침 재고 부속품이 하나 남아서 그냥 무상으로 수리해드렸습니다."
내일 아침 반납하려고 한 부속품이었다니, 오늘 급하게 오지 않았으면 내일은 없는 부속품에, 기다렸다가 유상으로 수리해야 할 판이었다. 물건을 소중히 여기는 주인의 배려로 신속하게 대처하였기에 10만 원의 이익까지 챙기게 되었다.
어떤 물건이든 자주 쓰다 보면 정이 들게 마련이다. '요것이 말만 못할 뿐이지...' 하면서 인격성을 부여하게 되고, 나의 삶에 나름의 도움을 주는 이기(利器)라 생각하면 아끼는 마음이 절로 든다. 그래서 오래오래 함께 하고픈 바램이 생겨 소중하게 다루게 되나 보다. 기술의 발달로 점점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이기들이 많아져서 좋기는 하지만, 자꾸 기능이 개선된 제품들이 나오기에 의리를 지키기가 힘들어진다. 그래도 생사고비를 함께한 지니만큼은 오래오래 간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