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기여, 안녕

by 글쓰고돈쓰고

양손에 물동이를 들고 간다. 현대판 물동이... 2리터짜리 6개들이 한 묶음씩, 양쪽 합해서 24킬로그램을 들고 가니 '영차영차'란 말이 절로 나온다. 게다가 양손이 무거워 발걸음은 잰걸음이요 허리는 구부정하다. 영락없는 북청물장수 꼴이다. 그 무게에 팔이 늘어나면서 다리는 줄어드는 것 같다. 집에 마실 물이 없다는 절박함이 타는 목마름이 되어 지금 나는, 물을 실어 나르고 있다.


서울시 공인, '아리수'라는 수돗물도 있고 최첨단 기술의 정수기도 있건만 나는 왜 백여 년을 거슬러 시대착오적 방식으로 물을 길어다 먹는 걸까. 정수기를 안 써본 것도 아니고 아리수가 못 먹을 물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수돗물은 그 원수야 깨끗이 정수 처리되었어도 집에까지 연결된 배수관이 의심스럽고 정수기는 유지관리가 문제 될 수 있는 데다 인체에 필수적인 무기물까지 걸러내니 오히려 역효과라서 꺼려진다.


인체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물, 그 중요함을 채우기 위해 현대인은 첨단과학의 힘을 빌고 있지만 너무 달려왔다. 단순한 물을 복잡하게도 마신다. 생수를 사 먹든지 그냥 수돗물을 끓여먹으면 된다. 좀 밍밍하다 싶으면 보리차나 결명자를 넣어 끓이면 맛도 좋고 향도 좋다. 특히 여름철 냉장고에 두고 마시면 청량음료 뺨친다. 단지 약간의 수고가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편리를 위해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정수기라는 기계에 의존한다. 편리와 수고로움... 이제는 이 두 가지 상반된 개념에 정리가 필요하다. 어떤 것이 진정 우리에게 이로운 것인가.


서울로 이사 오면서 과감해 게 정수기를 떼어버렸다. 3년간 매달 29,900원씩 세금 떼듯 총 백여만 원을 처먹어 묵직해진 그놈을 외면하기는 힘들었지만, '편리'에서 '수고'를 택한 결기가 결국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3년의 정을 끊어버렸다. 때론 살면서 '결기의 휘두름'은 필요하다. '단호함'으로 풀이되는 그런 행위는 찐득한 정을 떨어냄으로 뽀송한 삶을 보장한다. 야식을 끊으니 가벼운 몸짓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고 TV를 떠나보내니 저녁시간이 돌아왔다. TV나 정수기로 가능했던 인테리어 효과가 좀 아쉬웠지만 비움의 여백이란 게 공간을 채웠다. 심플함 또한 인테리어 항목 중 하나니까.


문명 다이어트 좀 해야겠다. 문명이라는 명분하에 편리를 돈 주고 사들여선지 우리의 고유 활동이 줄어들었다. 자동차로 인해 집 앞까지 걷지 않아도 되고, 인터넷쇼핑으로 앉아서 원하는 것을 살 수 있고, 즉석식품의 발달로 '해 먹는' 밥이 '사 먹는' 밥이 되고, 집안의 가전기기는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을 넘어 집안의 소소한 움직임까지 빼앗아 가고 있다. 예전에는 세탁기가 빨래만 하였는데 이제는 삶고 건조시키고, 특히 '스타일러'라는 가전은 입던 옷을 새 옷처럼 처리해준다.


이렇게 편리만 추구하다 보면 활동량 저하로 우리가 먹는 음식은 기초대사량만 빼고 모두 다 '살'로 갈지 모른다. 편리를 기반으로 한 '살의 역습'은 우리를 오히려 불편으로 몰아갈지 모른다. 병든 몸 자체가 불편 덩어리로 어쩌면 그동안의 편리함에 대한 '청구서'일 수도 있겠다.


결국, 편리란 물질에 의존하는 것으로 '편안'과 다르다. 편안은 정신적인 면도 중요하기에 '마음의 편안'은 있어도 '마음의 편리'는 없다. 생수를 집안에 가득히 쌓아놓고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땀은 흘렸지만 그 수고로움이 물을 마시는 시원함으로 환원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편리를 넘어서니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때 마침 전화가 왔다.


"왜 전활 안 받아! 몇 번이나 했는데"

"아, 물 좀 사다 놓느라고"

"물을 왜 사다 먹어, 힘들게. 인터넷 주문하면 되는데..."

"뭐라?!"


순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여기까지 뻗쳤나, 편리라는 마수(魔手)가... 단가 대비 무거운 생수도 집 앞까지 배달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 뒤에는 '규모의 경제'로 유지되는 자본주의가 있을 터, 대량 배달이라면 수익이 나기에 물 택배도 가능한 것이다.


접어야겠다. 그럼에도 계속 물을 길어다 먹기엔 나도 편리함에 이미 물든 현대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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