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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Apr 08. 2019

인연

중1 여름방학이었다. 길었던 머리를 박박 깎으면서 소년티도 벗고 가요와 팝송에 입문하면서 유행가의 통속에 눈을 뜨기 시작하던 때였다. 어설픈 듯 이성관도 생기고 아련한 듯 초딩때 짝꿍이 그립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아버지 친목계에서 4박 5일 울릉도 여행을 가게 되었다. 다 컸다고 생각했기에 부모님 따라가는 게 시큰둥했지만 울릉도란 섬이 끌렸다.


출발하는 날 아침 택시를 타고 모이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택시에서 내리는 순간 시간이 정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의 가슴은 뛰었고 뛰는 만큼 동공도 커지며 시선은 고정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얼굴이 바로 그 애였던 것이다. 나도 그녀를 봤고 그녀도 나를 보았다. 나는 머리를 올백으로 묶은 그녀의 상큼함을 보았는데 그녀는 나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아무런 의도함 없이 무표정으로 흘려보낸 눈길이 의미가 되어 돌아왔다. 서로가 그랬을까. 그 순간만큼은 영화 속 장면이라면 천만 관객을 넘길 만… 하기도 했다. 울릉도의 기대는 사라지고 관심이 그녀에게로 집중된 건 당연했다. 앞으로 4박 5일 동안 그녀도 함께 한다는 사실에 왠지 영화가 계속되리라는 기대로 안도감이 밀려왔다. 혹여 우리 일행이 아닌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행히 관광버스에 그녀도 탔고 나도 탔다. 안도감이 설렘으로 바뀌면서 버스는 부릉~ 기분 좋게 출발했다.


여름 아침은 싱그러움 그 자체다. 평소 다니던 길이 아니기에 창밖의 나무와 이슬 맺힌 풀잎들은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고 아침햇살은 내 마음까기 비추었다. 나의 울릉도 여행을 미리 보는 것 같았다. 앞쪽에 앉은 그녀도 좌우로 고개도 돌리고 위아래로 팔을 움직이며 여행의 설렘을 표현하는 듯 보였다. 룸미러와 백미러를 번갈아 보며 운전하듯 나의 시선은 그녀와 창밖을 왔다 갔다 했다. 휴게소에 머물 때 엄마가 그 애한테 삶은 달걀을 주었는데 껍질이 깨진 거였다. 안 깨진 것도 있는데 깨진 것부터 주냐고 말하려다 속마음이 들킬 것 같아 말았다. 괜스레 엄마가 준 호의마저 깨질까 걱정되었다. 포항에 도착하여 울릉도행 배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그녀를 엿보는 것으로 지루하지 않았다. 간혹 마주칠 때가 있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6년 내내 옆에 여자가 있는 자리에서 공부를 하였건만 실전엔 왜 그리 약한지. 필드는 항상 와일드한 법이다.


무사히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했다. 처음 타보는 지라 뱃멀미로 속이 울렁거렸는데 항구의 비릿한 내음과 오징어 말리는 냄새에 오히려 진정되었다. 어스름한 저녁인데 벌써부터 오징어잡이 배가 집어등을 환하게 켜고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항구의 깎아지른듯한 절벽 위에는 소나무가 독야청청 하였다. '남산위의 저 소나무' 보다 더한 철갑으로 바람을 이겨내며 바위 틈새를 뚫고 자란 모습이 늠름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울릉도에 온 소감이 어떠냐고 지나가면서 물어봤다. 나 또한 어깨 펴고 늠름한 기상으로 신난다고 대답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건조대 위에 오징어나 쥐치들이 줄줄이 늘어선 것이 마치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도열해 있는 듯했다. 주변 모두가 낯선 풍경이지만 우리를 반겨주는 것으로 보였다. 여행이라는 것이 이렇게 낯선 것을 보는 것부터 시작해서 몸으로 느끼고 즐기며 돌아와선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임을 나중에 깨달았다. 각 가정마다 민박집을 정하고 그날의 여독을 풀었다.


부모를 닮아 늘씬한 키에 이목구비도 뚜렷했던 그녀는 초등학교 6학년 치고는 성숙해 보였고, 당시 원더우먼의 인기로 별무늬가 찍힌 핫팬츠를 입었던 게 기억난다. 20여 명의 일행이 울릉도 구석구석을 돌아다닐 때 별들도 어지러이 떠다녔다. 그 모습으로 첫인상 때 받았던 상큼함에 발랄함까지 더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첫 대화는 언제 이루어지는 걸까.


아이들은 우리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녀의 오빠를 포함 위로 고1인 형부터 초등 3,4학년 정도의 여자애까지 예닐곱은 되었다. 그런 연령분포의 중간인 나는 그녀를 향한 아무런 경쟁자가 없었기에 완전히 나를 위한 조연들로 생각했다. 이제 배역들은 정해졌다. 나는 고1 형이랑 친해진다. 그 형은 나의 이성에 대한 물음에 나보다 나이 많은 것 이상으로 알토란같은 조언을 해준다. 그녀의 친오빠는 나를 경계의 눈으로 감시하며 자신의 여동생을 지킨다. 그 외는 모두 단역으로 병풍과 같은 존재다. 이것이 나의 각본이고 연출이다. 아이들 세계에 어른들은 단지 관객일 뿐이다.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다 고만고만한 애들의 놀이요 일회성 만남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애들이라도 그들만의 세계는 진지하고 그래서 고민하고 성장한다. 어른들도 그런 시기를 거쳤겠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라 과거는 아득하기만 하다.

대본만 없을 뿐이지 내가 정한 배역대로 스토리가 흘러갔다. 나는 고1 형이랑 친해졌고 예상대로 그녀의 오빠는 자기 동생이랑만 다녔다. 저녁때 어른들이 술과 고기로  회식할 때 우리들은 저녁식사 후 따로 모여 게임을 하였다. 카드놀이였다. 형의 주도하에 자리 배치나 상황이 나를 위한 조작으로 역력했다. 점심때 형한테 상담한 것이 주효했다. 역시 아이들이라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었다. 두어 시간의 놀이중 벌칙을 핑계로 그녀의 손목을 세 번 정도 잡았고, 두 번 마주 보고 웃었고, 한 번인가 ‘오빠’라는 호칭을 들었다. 그동안 바라보기만 했던 거에 비하면 시간대비 상당한 수확이었다. 게임이 끝나고 일어나면서 나는 형한테 의미 있는 미소를 보냈다. 그렇게 의미 있는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비릿하기만 했던 오징어 냄새는 향기로웠다. 어젯밤 게임을 끝내고 헤어지면서 "낼 보자" 라고 했던 말과 "그래, 안녕" 이라고 들었던 말이 교차하면서 향기를 뿌렸나 보다. 그렇게 우리의 첫 대화는 짧지만 강렬했고 그 여운은 밤새 나를 설레게 했다. 아침부터 분주했다. 작은 배를 전세 내어 섬 일주를 떠난단다. 엄마는 아침식사로 오징어를 잔뜩 넣어 찌개를 끓여주었다. 오징어가 싸기도 했지만 너무도 싱싱해서 맛있었다. 그야말로 물 반 오징어 반인 국물을 휘저으며 나의 수저는 오징어 낚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그녀의 마음도 낚아야 할 텐데... 밥 먹으면서도 나름 고민했다. 이래저래 든든히 배를 채우고 배에 올랐다.


작은 배라 심하게 흔들렸지만 가까이서 보는 섬의 절경이 움직이는 것 같아 생동감 있게 보였다. 바위섬 사이를 가까스로 지나갈 때 출렁이는 파도는 철썩거리며 더 큰 물살로 배를 위협했다. 누구는 그것이 '천혜의 자연'이라며 눈 뜨고 감상했고 누구는 그것이 '자연의 소리'라며 눈 감고 귀 기울였다. 나는 단지 어지러워서 눈을 감았는데 철썩 소리는 더 커지고 아래위 배 흔들림도 심해졌다. 그런데 잠시 후 눈을 떠보니 깜짝 놀랐다. 옆에 그녀가 있는 것이 아닌가. 눈 감은 건 잠시뿐이었는데 그새 배의 흔들림으로 사람들의 포지션이 바뀌었나. 그야말로 천혜의 자연...스러움으로 그녀는 다가왔다. 자연히 우리는 배의 흔들림에 어우러졌고 주변 경치에 동화되었다. 아름다움에 탄성을 질렀고 신기함에 감탄했지만 그 대상이 자연인지 그녀인지... 나는 그저 그 순간순간을 즐겼다. 그녀가 하는 말은 하나같이 '내 귀에 캔디'였기에 마디마디 조각내어 마음속에 간직했다. 돌아서면 곱씹게 될 단물나는 풍선껌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추억은 쌓였다.


4박 5일의 일정은 참 빨리도 지나갔다. 그만큼 14세 소년에게 모든 것이 가슴 벅찬 체험이었다. 아득한 수평선을, 그 위의 구름을, 드넓은 바다를 그림이 아닌 실물로 보았을 때, 자연 앞에 선 나는 오히려 자아를 깨달으며 뜀틀 앞에 놓인 발판을 힘껏 딛고 도약한 것처럼 훌쩍 커버렸다.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마지막 날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가는 배, 갑판 위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내 팔을 세게 꼬집으며 따라오라고 했다. 당시 여자한테 세게 꼬집힐수록 애정의 농도는 짙다고 하는 남자애들만의 믿음이 있었다. 나는 아팠음에도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 따라갔다. 그런데 이게 웬 운명의 장난인가. 그녀의 오빠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동생을 낚아챘다. 아빠가 부른다면서 그 인간은 무슨 이머전시한 상황인 것처럼 연출했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끌려갔다. 닭 쫓던 개꼴이 된 나는 머쓱해서 옆에 화장실로 들어갔는데 웬걸, 불렀다던 그 아빠가 화장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런... 그 인간이 나의 로맨스를 낚아챈 것이다. 덩치는 산만한 게 하는 짓은 쪼잔했다. 그때 그녀는 날 불러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을까. 요즘 같으면 핸드폰 번호나 물어봤을 텐데. 그 당시엔 그에 해당하는 멘트가 무엇이었을까. 뭔지는 몰라도 숫자를 매개로 한 호감의 표현보다 구체적이지 않았을까. 졸지에 나는 평생의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 성인 같다. 80년대 초 교복자율화로 사복을 입히니 대학생과의 구별이 어려워졌다고 메스컴에서 떠들었던 건 약과에 지나지 않을 만큼, 지금은 성인 뺨칠 정도로 진한 화장에 때론 성인보다 짧은 치마에 스스럼없는 이성과의 접촉으로 이미 성인과의 구분이 없어졌다. 물론 자신을 가꾸고 교우관계를 이성으로까지 넓히며 자율을 누리는 것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할 수 없다. 모든 것에 공부가 뒷전이 된다 해도  그 결정까지 자신의 의사로 존중되는 요즘 시대에 누가 있어 잔소리하는 '꼰대' 역할을 자처할까. 또한 다원화된 사회에서 공부는 예전처럼 절대선(善)으로부터 물러난 지 오래다. 다만 청순함이랄까, 그 나이에만 누릴 수 있는 것은 건너뛰고 때가 되면 자연히 누리게 되는 것은 미리 당겨쓰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뭐가 그리 급한 걸까.


아쉬움을 남기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난생처음 바다를 건너가는 여행과 더불어, 풋풋한 감성체험으로 나의 유년도 넘어서는 성숙을 맞이했다. 어느덧 그녀의 존재는 나의 삶 속에 실존이 되었고 2년마다 떠나는 친목 여행의 기다림이 되었다. 그 이후로 동해의 하조대에서 그리고 서해의 대천해수욕장에서의 만남은 그리움을 충족시켜 주었고 헤어짐은 그만큼의 아쉬움을 남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관광버스에서 먼저 내리면서 혹시나, 뒤돌아보았는데 그녀 또한 나를 보느라 눈길이 마주쳤던 것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런 것을 '경이적 모멘트'라고 하던가. 나중에 국어시간 때 배웠다. 3박 4일 또는 4박 5일의 여정 속에 학생으로서 우리는 그 시대가 허용한 만큼의 친목을 다졌고 그 이상의 것은 일탈이나 탈선으로 여겨 마음속에만 가두었다. 요즘과는 세대 차이가 확연히 느껴질 정도의 괴리감이었겠지만 그때는 '절제의 미학'이란 것이 있었다.


'욕구'와 '욕망'이란 것이 있다. 둘 다 어떤 결여로 인한 '충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비슷할지 모른다. 그러나 욕구는 단순히 부족함을 충족시켜주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욕망은 완전한 충족은 뒤로 미루면서 여전히 충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욕망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으로 인간은 음식을 먹을 때도 먼저 애피타이저를 먹으면서 완전한 충족은 뒤로 미룬다. 이성과 데이트할 때도 커피나 와인을 마시면서 대화로 분위기를 이끌며 접촉을 유보한다. 욕구 충족 뒤의 허무함을 경계하기 때문일까. 그것에 이르는 과정을 즐기면서 진정한 욕망을 완성해 나간다. 그때는 욕구와 욕망의 이론적 차이를 알 리 없었겠지만 그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과정'을 중시한 '유보'였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 절제의 미학은 '기다림'에서 시작되어 '준비함'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모범생이 아니더라도 짐작할 수 있는 시대였다. 단지 실천의 문제일 뿐이었다.


잘 있었니, 학교는 어디야, 바닷가엔 안 가, 저거 먹을래, 너네 엄마가 부르신다, 우리 오빤 안 왔어, 석양이 멋지다, 오늘은 배 타고 나간대, 심심하지 배드민턴 치자, 내일이면 집에 가네, 다음에 또 올 거야...


어떤 것은 물음이고 어떤 것은 대답이었을 주고받은 몇 마디의 말에는, 내용에 살짝 비껴난 마음을 담았을 수도, 아님 더 깊은 고백이 담겨있었을 수도 있겠다. 요즘의 직설과는 다른 나름의 은유와 상징이었을 그때의 대화였기에 입안에 가끔 맴돌 때가 있다.


그렇게 내 유소년기, 세 번의 만남은 아쉬움을 남기고 끝났다. 그 후로 나는 기다리고 준비했고 시대가 허용할 수 있는 때라 생각한, 대학을 들어가고 그녀 또한 대학생이 되었을 때 드디어 나는, 얼핏 들은 그녀의 대학 과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때는 그동안 눌려 있었던 청춘의 욕망이 젊음이라는 객기 어린 특권으로 분출할 때였다. 그것은 과사무원의 부재로 아예 1학년 담당 교수를 찾아가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다시 한 번 소나무의 늠름한 기상으로 그녀의 이름 석자를 대면서 일단 그 학교 학생인지부터 확인하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그런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지나간 세월이 아득하다. 그래도 내 당당한(?) 물음에 교수는 기꺼이 출석부를 뒤적이더니 난처한 듯 그런 학생은 없는데...라며 미소 지은 것은 기억난다. 자신하였건만 뜻밖의 대답에 나는 실망하고 교수실을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결국 그 학교의 경주캠퍼스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울에서 경주는 천년고도만큼 아득하고 천리 길만큼 멀게만 느껴져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 했다. 인연은 거기까지였고 우리들의 경이적 모멘트는 마지막 장면이 되어 나의 추억에 묻히게 되었다. 피천득의 '인연'처럼 그녀의 시든 모습까지 보지 않아 다행이다. 오히려 어렸을 적 두 번만 보고 평생 사랑에 빠진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처음 모습 그대로 마음속에 남아서 여전히 내 유년의 풋풋함을 더해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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