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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Feb 25. 2019

시간 여행

'오래된 미래'가 있다면 '여전한 과거'도 있다. 현재, 미래, 과거란 단지 시간상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던 과거의 잔상을 실제 눈앞에 두고 확인할 때, 아련한 시간 속의 향기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추억과 오버랩되며 한동안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라오스로 날아왔는데,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였다. 현지 공항은 간신히 에어컨 냉기로 더위를 식혔을 뿐, 첨단공항과의 시설 차이로 그만큼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게 하였다. 좁은 통로로 이어지는 출구는 마치 시간의 미로를 헤매는 듯, 결국 영화 '인터스텔라'의 웜홀(worm hole)이 되어 나를 과거로 옮겨 놓았다.  


전봇대에 의지하여 길게 늘어진 전깃줄, 공원의 벤치부터 불상의 조각까지 시멘트 원조(援助)의 풍부함으로 빚어낸 조형물들, 벽돌 아니면 시멘트 벽체가 대부분이라 3층 이상을 넘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건물들, 낡은 차량들이 지나가면서 내뿜는 매연과 먼지, 그것들이 고스란히 쌓일듯한 가판 위의 구워 놓은 바나나, 그리고 얼음덩어리가 들어있어 냉차임을 알 수 있는 형형색색의 주스통들... 언뜻 보기에 이국의 낯선 풍경인 것 같지만 곧바로 우리가 지나온 과거적 모습임을 떠올리게 한다.



그곳은 가난이지만 순박함이고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옛날에는 우리도 그랬다. 아직 물신(物神)에 지배되지 않은 청정지역이랄까. 기교가 없기에 담백하다. 지나가는 어린 학생에게 미소를 띠면 더 환한 표정으로 되돌아온다. 가게에서 물건을 조금이라도 많이 집어 들게 되면 주인은 "쏘리~" 하면서 바구니를 건네준다. 호텔이나 음식점에서 팁이라도 줄라치면 두 손을 합장하며 감사히 받는다. 그냥 받아도 되는 것을, 그 잠깐의 제스처가 건네주는 돈에 마음을 담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넘어가도 그 시대의 사람들과는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보이기만 할 뿐, 단절된 시간의 벽은 유리창이 돼버린다. 영어도 못하는 라오스인들과는 소통이 거의 전무했다. 보기만 했다. 그리고 일방적 느낌만이 나의 몫으로 남게 된다. 무성영화를 보듯 '여전한 과거'가 눈앞의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는 관찰자가 된다. 생계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번듯한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보다 그 밑에서 바삐 일하는 종업원들이 눈에 들어오고, 두 시간 동안 땀을 흘리며 여행자의 피로를 풀어주는 마사지사의 가녀린 손과 오토바이를 개조한 '뚝뚝이'를 매연 속에서 꿋꿋이 몰며 하루를 힘차게 여는 운전사의 무뚝뚝한 표정이 라오스의 민낯으로 다가온다. 모두가 삶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지만 아마도 이를 견뎌내는 나름의 꿈도 있을 것이다


관찰자로서, 그들의 근면성 내지는 노동의 신성함 같은 교과서적 감상은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 물음이 나를 일깨웠다. 인간은 육신과 정신을 모두 충족시켜야 하기에 자연인이면서 문화인이다. 그에 따른 육체적 욕구와 정신적 욕망을 현대인은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근면성과 함께 노동의 '신성함'을 신앙 삼아 오늘 하루도 버티는 것이다. 이는 누구도 아닌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각자의 굴레다.


뉴질랜드 여행 때 멀리서 본 양들의 모습은 꼬물꼬물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니 모두 다 하나같이 주둥이를 땅에 붙이고 있었다. 잠시의 쉼도 없이 계속해서 풀을 뜯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 주어진 이상 그 영속성을 위해 수고해야 한다는 자연의 준엄한 법칙이었다. 그것이 인간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동물과 달리 인간은 그 만족에 끝이 없다. 어찌 보면 그러하기에 점점 더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문명의 발달과 함께 그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소비가 뒤따라야 할 터, 이를 위한 소득도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카카오톡에서 '삼소'를 읽었다. 법정 스님의 글귀로 사람은 세 가지가 적어야 행복해진다고 한다.


  입안에는 말이 적어야 하고,

  마음에는 생각이 적어야 하고,

  뱃속에는 밥이 적어야 한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라오스에서는 딴 세상 이야기일 것이다. 한 번이라도 배불러 보았어야 생각 좀 해볼까, 모든 게 해보고 나서 일이다. 부모님의 잔소리도 당신이 청춘을 살아봤기에 하는 말일 게다. 발전단계를 거쳐본 우리로서는 단지 바라볼 뿐이다. 지난날의 향수를 느끼며...

  

과거를 뒤로하고 다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이르다 싶은 늦가을의 찬바람이 무더웠던 라오스의 시간여행을 백일몽으로 만들었다. 차가운 현실이 나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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