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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Apr 15. 2019

일백평, 정원 있는 집

일백 평, 정원 있는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그 집은 사람으로 치자면 잘생긴 얼굴에 비율 좋고 말쑥한 용모였다. 정남향으로 집보다 넓은 면적의 정원이 시원한 인상을 주고, 담장 둘레의 어느 모서리도 구겨지지 않은 반듯함이 안정감을 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헌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주문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침 등교할 때 헌집을 나와 하교할 때 새집을 찾아가서 받은 나의 느낌은 그러했다. 네모 반듯... 그 첫인상은 20년 동안 그 집을 드나들면서 변함이 없었다.

그전엔 기와지붕이지만 한옥은 아닌 벽돌집에서 살았고, 다음으로는 좁은 마당에 3층이나 되는 가분수격의 집에서 살다가, 다시 좁지만 제법 잔디도 있고 나무도 몇 그루 있는 정원을 갖춘 집으로 옮겨 잠시 살았는데, 특히 똑같은 집이 두 채가 붙어있는 쌍둥이 집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런데 쌍둥이라는 특징 때문에 잠시 동안만 살게 된 것인데 어느 효자 아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기에 맞춤 맞다 하여 후한 가격으로 우리 엄마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한 가격은 엄마의 발품으로 더 넓은 일백 평, 정원 있는 집을 오히려 '박한 가격'으로 살수 있게 해주었다. 거기에는 쌍둥이 집을 두세 달 만에 처분하느라 미등기로 세금까지 피할 수 있었던 운도 한몫했다.

그리하여 나는 유년의 끝에서 사회 초년생이 되기까지 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 거의 20년 동안 성장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고 그때그때의 추억이 서려있기에 그 집은 나에게 거의 의인화되다시피했다. 나의 성장을 말없이 지켜본 든든한 버팀목이랄까. 창가에 따사로운 햇살을 들여와 나를 다독이기도 하였고 정원의 꽃나무로 나를 설레게도 하였다. 누나들 시집갈 때 함 오는 날은 정원이 넓어서인지 너른 차양의 잔칫집 분위기를 돋우어 주었고, 조카들이 뛰놀 때는 도심 속의 자연으로 시골집을 방불케 해주었다. 모닥불 피워놓고 밤이나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저녁 밤하늘까지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그 넉넉함은 알라딘 램프의 지니처럼 든든했다. 집은 단순히 '생활을 담는 용기'의 하드웨어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 다듬어주는 소프트웨어의 역할도 한다. 내 방의 창문을 열면 말 그대로 '언덕 위의 하얀 집'이 보였는데, 석양이 질 때면 황금빛으로 변하고 밤이 되면 그 언덕 너머 점점이 비치는 작은 별들이 나의 감성을 자극하였다.

정원이 있다는 건 사계절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집안으로 끌어들여 나무와 풀, 바람과 비를 움직이면서 시간의 흐름을 연출한다. 계절을 달력의 숫자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고 냄새도 맡으면서 온몸으로 느끼는 체험이 되어 나를 살찌우게 하였다. 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어느 구석엔가에서 막 달려오는 강아지의 반김은 또한 나를 감동케 하였다. 그곳이 바로 나에게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이었다. 그런데 한술 더 떠 고향이 시골인 아버지는 적극적 행위로 당신의 바램을 구체화시켰다. 이사 오자마자 잔디 깔린 정원 한가운데에 고추며 딸기, 토마토, 상추, 부추 등을 심으셨다. 그렇게 시작한 텃밭은 나무 밑이나 심지어 시멘트로 덮인 편평한 마당까지도 일부 걷어내어 그 면적을 넓혀갔다. 나는 정원이 '전원'이 되어가는 것에 불만이었지만 귀농에 대한 아버지 나이대의 향수를 이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텃밭농사로 푸성귀의 풍성함은 한껏 누릴 수 있었는데 고기보다 채소나 과일을 좋아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인 듯하다.

엄마는 집 내부에 관심이 많으셨다. 일단 부엌 딸린 방을 없애 주부의 영역인 주방을 넓히고 싱크대를 햇빛 나는 창가로 옮기는가 하면, 삐거덕 거리던 나무 마룻바닥을 뜯어내고 온돌을 깔아 아늑한 거실로 만들었다. 그 후로 겨울이면 방과 방을 잇는 통로로만 사용하던 거실이 집안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현관 앞에 공간을 두어 이제야 유행하는 아파트의 전실을 예견하였고, 새 학년이 되면 적어도 내 방만큼은 손수 한지장판을 깔고 니스칠을 하거나 벽지를 새로 붙여 학생으로서의 각오를 다잡게 하였다. 지금은 비닐장판이 대세지만, 갓 풀칠한 한지와 니스칠의 내음은 새로 받은 교과서 책 냄새와 어우러져 나로 하여금 반듯한 모범생 캐릭터를 갖게 했다. 잠시나마.

가속이 붙은 엄마의 집단장은 집안의 편리를 넘어 수익으로까지 연결하는 수완을 보였다. 바로 베란다 밑, 1층의 빈 공간에 원룸을 증축해 세를 놓은 것이다. 바로 앞 정원이 보이는 넓은 창문이 있어 방이 좁아도 답답하지 않은지 세는 금방 나갔다. 하지만 상가주택이라 그 방의 벽으로 인해 창문이 막혀버려, 기존의 상가 쪽 세입자들의 불만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이를 어떻게 무마시켰는지 이로 인해 엄마의 수완에 관리능력도 추가됐다. 이렇듯 총체적 능력이 요구되는 작업의 결과물이 보기에 좋았던지 우리 집과 똑같은 구조의 앞집도 바로 벤치마킹에 들어갔다.

엄마는 매달 월세를 받는 것에 만족해했지만 이 원룸이 우리에게 준 열매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훗날 집을 팔았을 때 수천만 원의 세금을 절감해주리라고는 아무도 예측 못 했다. 이사 갈 당시 20배 이상 뛴 집값에 당연히 양도소득세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당시 세법으로 부과되는 세금 액수는 상가부분과 주택 부분의 면적 비율에 따라 차이가 났다. 다행히 전에 지었던 원룸의 추가로 주택 부분의 면적이 가까스로 과반을 넘어 주택으로 판정, 세금을 줄일 수 있었다.

결초보은이 전래의 미담만은 아닌가 보다. 생명체도 아닌 무정(無情)의 주택이라도 정성된 마음으로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면, 주인에게 심신의 위안을 주며 재물의 복으로까지 보답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은 그래서 흉가가 되고 절로 무너지기까지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원을 가꾸면 나무와 풀에 생기가 돋고 집 건물을 수리하고 단장하면 그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의 기질까지 발휘하게 된다.

그 집을 나와 난생처음 아파트로 이사 갔다. 그래도 1층이어서 앞뒤로 나무가 보이고 흙냄새도 나고 빗소리도 들렸지만, 12개동이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하나의 거대한 콘크리트 더미로 내 몸은 인식했나 보다. 바로 아토피에 걸렸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아파트 기행은 이곳저곳 20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그 집에서 산 만큼의 세월이다. 뛰노는 강아지도 없고, 계절은 언제 지나가는지 피부에 와닿지도 않고, 화분에 나무와 풀을 옮겨놓았지만 비도 맞지 못하고 바람 한 점 스치지 않는 처지가 애처롭기만 하다. 게다가 내 집도 아니란 생각에 그리 애착심으로 집을 돌보게 되진 않는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한다. 어릴 적 뛰놀던 '넓은 벌 동쪽 끝'은 나에겐 서울이라는 지명으로 다가오지 않고 '정원 있는 집'이란 형태로 다가온다. 나무와 대화하고 풀벌레를 친구 삼았던 유년의 시기 또한 인생의 고향이라면, 향수가 짙어지는 노년에는 정말로 일백 평은 아니더라도 정원 있는 집으로 회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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