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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Apr 23. 2019

레베카(Rebecca)

"나에게 돌아와!! 레베카~~♬"


두 팔 벌려 외치던 댄버스 부인은 그렇게 절규했고 관객은 박수로 열광했다. 그것은 댄버스 부인만의 외침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의 공명(共鳴)이었다. 객석은 순식간에 흥분의 도가니로 감동의 물결이 되었다. 어떤 것도 그 순간만큼은 배우의 열창과 라이브 선율 속에 모두 녹아내릴 정도로 하찮아 보였다. 엊저녁 인터넷이 느려 짜증을 냈었던가. 상쾌한 아침의 새소리는 뒤로한 채 층간 소음에 불쾌했었나. 사람들이 무심코 한 말에 상처를 받았었나. 모두 부질없다. 댄버스 부인의 절규에 모든 것을 날려 보낸다. 단지 그녀는 레베카를 열망하며 부르짖었을 뿐인데 그걸 듣는 우리는 각자의 마음에 감동의 소용돌이를 일으켜 모든 것을 정화시키고 말았다. '카타르시스'였다.


뮤지컬의 묘미는 밋밋한 스크린에서 튀어나온 장면과 대사가 입체적인 현장감을 통해 관객을 몰입시키는 데 있다. 그만큼 부풀어진 감동은 영화보다 훨씬 부풀려진 관람료에도 우리로 하여금 너그럽게 한다. 좀 더 단정한 복장으로 좀 더 정제된 마음으로 레베카를 만나러 간다. 이는 영화에서 뮤지컬로, 오락에서 예술로 넘어가는 경계에 대한 예의일 수 있다. 생수는 넘어도 콜라나 팝콘은 넘지 못하는 경계... 


이제껏 오늘이 어제 같고 대화 아닌 단순 소통의 별 뜻 없는 삶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못했던 지난날이었다. 외치고 노래하고 흥분하며 감정을 발산하고 싶었지만 가장이기에 주부이기에 배우는 학생이기에 각자의 역할에 치여 모두 다 누르고 또 눌렀다. 뚜껑이 들썩여도 내일의 '비범'을 위해 오늘의 '평범'을 선택한 것이다. 내일의 '분출'을 위해 오늘의 '눌림'을 감내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감성은 늘 보글거리는 활화산이다. 우리의 느낌은 현재형이니까, 살아있으니까. 들썩거리며 뿜어져 나오는 열정에 눅눅한 빨래 말리듯 펼치지 못한 꾸깃한 감성을 활짝 펴 말리고 싶다. 뽀송한 마음으로 삶을 펼치고 싶다. 


공연하는 세 시간 동안 배우는 그들이 내뿜는 연기와 노래로 시시각각 변하는 무대를 배경 삼아 관객을 일상에서 끌어낸다. 관객은 그 순간, 댄버스 부인에게서 집착을 막심에게서 고뇌를 나(me)에게서 사랑을 그리고 레베카에게서 자유를, 자신에게 투영한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인생이란 '같은 듯 같지 않은' 각자의 삶이기에 세월의 굽이굽이마다 공감이 있고 반성이 있다. 그러나 캐릭터들의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삶의 필수조건이다. 


"나는 레베카를 사랑하지 않았어. 오히려 증오했다구!!"


막심의 이 고백은 반전을 이끌며 그의 반려자인 '나'를 변화시킨다. 이때부터 관객의 예감과 직감에 혼돈을 주면서 극의 분위기는 고조된다. 서로의 사랑이 재확인되고 두 사람의 응집력이 외부의 장애를 헤쳐 나가는 모멘텀이 된다. 두 개의 갈등 세력이 확연해지면서 그들의 대결에 관객은 집중한다. 레베카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타살로, 그 범인을 남편이었던 막심으로 몰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럴듯한 정황'들이 '과연 그럴까'하는 관객의 긴장을 코너로 몰아붙인다. 


무대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레베카는 배우들의 대사에선 수시로 튀어나온다. 그녀의 행동들이 관심 속에 피어나고 갈등도 일으키며 스토리의 중심이 되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스토리를 살찌운다. 그걸 보는 관객은 무엇을 살찌울까. 


우리는 순간순간의 선택으로 점철되는 한 번뿐인 인생을 산다. 그러기에 선택에 따라 달리 일어날 수도 있는 우연과 필연에 미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간접 체험으로라도 우리의 인생을 풍성하게 하려는 이유다. 일상에 허덕이며 단색으로 채색되게 마련인 삶을 알록달록 일곱 빛깔 무지개로 채우고 싶다. 이 꽃 저 꽃 헤치며 나아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온몸에 화분을 묻히는 꿀벌처럼, 무대와 배우 사이를 온 감각으로 헤집다 보면 막이 내릴 때쯤 온몸에 분가루가 묻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자체가 삶의 자양분이 될 것 같다. 


인간의 욕망과 시기가 레베카를 임신한 여자로 죽임을 당한 여자로 어쩌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여자로 몰아가지만, 결국 그녀가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그녀는 암 환자였다는 의사의 증언으로 모든 의문은 풀리고 만다. 관객의 긴장도 풀리면서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이때 들리던 노래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어젯밤 꿈속 맨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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