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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May 14. 2019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성과 속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자리 잡은 성당의 입구에서 주변을 둘러보니 미군부대도 있고 아파트촌도 있고 학교도 보인다. 그런 것들을 아우르는 회색빛 속세의 한가운데에 초록의 싱그러움과 적갈색 벽돌이 잘 어우러져 있는 수도원이 우뚝 자리하고 있다. 짧지만 1박2일 동안 씻어 내리라, 세상에 찌든 때를…. 자동차가 달리는 주변의 도로를 성속의 경계인 양 엄숙히 받아들이며 수도원에 들어섰다.


급기야 예배시간에 드럼과 전기기타의 출현으로 경건함이 갈수록 메말라가는 교회의 세태에 개신교인인 나의 신앙도 메말라가고 있었다. '오직 말씀으로!'라는 구호로 가톨릭에서 분기해온 개신교는 그 말씀만 너무 추구한 나머지 형식을 잃었다. 아니 버렸다 할 정도로 이제는 십자가도 제단에서 끌어내린 교회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십자가까지, 보이는 것은 모두 우상으로 여기는 말씀 위주의 신앙에 교회는 치우쳐 가고 있다. 형식이 없으면 어디에다 내용을 담을까. 십자가에 대한 예를 갖추고 성호를 그으며 성수로 자신의 죄를 씻고자 하는 몸의 행위를 통해 경건함을 일으켜야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이야말로 주님의 말씀을 행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장17절)

루터가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한 야고보서의 말씀이 오히려 가슴에 와 닿는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말씀을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세상에 나가 행해야 할진대, 가톨릭의 전례가 중간단계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전례에 있어 그런 전통을 지켜가는 곳이 수도원이라 한다.

일반 신도가 머무르는 '손님의 집'에 방을 배정받고 그리로 향했다. 성당과 마찬가지로 그 건물도 묵직한 원목으로 짜인 현관문이 입구에 버티고 있었다. 곳곳에 철물이 박힌 그 문은 마음속 군데군데 신앙이 박혀 있는 수사들을 보는 듯했으며 열쇠로 두 번이상 돌려야 겨우 문이 열리는 구조는 방문자의 경건함을 두 번 이상 다짐받는 듯했다.

  '자신을 비울 수 있느냐, 철커덕!'
  '네, 준비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채울 수 있느냐, 철커덕!'
  '네,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럼 됐다, 딸깍!'

어렵사리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은은한 어둠이 고요를 품고 있었다. 그 어둠에 발목이라도 잡힌 듯 발걸음조차 제소리를 삼키며 방으로 향했다. 흰색의 벽지와 고동색의 몰딩은 역시 하얀 이불보와 원목 책걸상뿐인 방의 정갈함과 잘 어울려 피정이 절로 느껴졌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수도원 일과표는 기도하고 일하는 것 빼놓고는 여분의 시간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여 경계 밖 세상사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겠다. 때가 되면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자세가 흐트러지려는 병사에게 '차렷'자세를 요구하는 것같다.
 

저녁 미사 때도 되었고 미리 성당 내부를 둘러볼 겸 일찌감치 2층 본당에 들어섰다. 텅 빈 성당을 들어서니 역시나 흰색의 벽면과 창문 테두리인 고동색 원목에서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이미지를 느꼈다. 그것은 수도원의 청빈함과 어울리는 것으로, 흰 벽면과 고동색 원목이라는 두 개의 건축적 요소는 사랑과 평화라는 교회의 메시지가 시각적으로 형상화된 것이 아닐는지. 그런 생각으로 앞쪽의 장의자에 앉으니 바로 마음에 평온이 왔다. 저 앞에 십자가는 이천 년이 넘도록 여전히 예수님을 매달고 있다. 우리 모두가 그 십자가를 향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은 계속 거기서 고통을 받고 계실 것 같다. 우리나라에 몇 안된다는 오른 편의 대형 파이프 오르간은 때론 예수님의 고난을, 때론 예수님의 탄생을, 복음을 울렸으리라. 곧 오르간이 연주될 것을 생각하니 미사 시간이 기다려졌다.

어느덧 제대의 촛불이 켜지고 수사님들이 입장하는 것으로 미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아까는 드문드문 보였던 수사들이 언제 그리 많이 모였는지 한참 동안이나 줄을 지어 들어왔다. 신도보다 많겠다 싶어 뒤를 돌아보니 웬걸, 뒤에도 신도들이 꽤나 앉아 있었다. 어디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는지 조금 아까 밖에서는 사람들이 드물어서 고즈넉하기까지 했는데 신도거나 수사거나 곳곳에서 각자 행할 소임들을 하는 도중 종소리가 울리면서 성당으로 모여든 것이다. 신기했다. 여기는 관광지가 아니라는 증거다.

사람은 자기 손으로 어디까지 자급자족이 가능할까. 손이 모자라면 가족이 한 단위가 되어, 그것마저 모자라면 공동체가 한 단위가 되어, 이문을 생각지 않은 순수 노동의 산물로 살아간다면 그 삶 자체가 수도가 될 것이다. 수도원의 창시자 성 베네딕도가 강조한 '기도하며 일하라'라는 가르침은 이를 뒷받침한다. 돈을 불리려는 게 아닌 배를 불리려는 노동의 결실로 우유나 소시지, 쨈, 채소, 제철 과일 등은 식사 때마다 먹는 기쁨을 주었고, 밀랍초나 샴푸, 오일 등은 수공예의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노동이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에 그로 인한 결실은 믿고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무한증식을 꿈꾸는 돈과 달리 만족할 줄 아는 배는 그만큼 정직하다.

그래서인지 한낮의 노동 끝 저녁은 그 피로를 풀기에 충분할 정도로 조용하다. 누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했던가. 여기서는 '낮은 낮이고 밤은 밤이다' 한낮의 후끈함은 노동의 열정이지만 밤의 적막함은 휴식의 배려다. 물론 수도사들에게는 그 시간조차 기도로 채워질 테지만... 방문객인 우리들은 그저 그분들의 후광에 기댈 뿐이다. 그 적막함은 도시에선 느낄 수 없는 청정이었다. 적막함에서도 소리가 난다. 아니 그제야 들리는 것이다. 내면의 소리가, 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소리가, 그동안 속세에 파묻혀 잊고 살았던 자아의 외침이 들린다. 그것은 과거의 자아이기도, 미래의 자아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왔나, 어떻게 살 것인가. 후회와 자책이 들다가도 만족과 설렘이 교차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주님을 찾는다. 그래서 피정이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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