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이나 잤을까, 버스는 벌써 문막 톨게이트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창밖의 짙은 안개로 몽롱함에 취해 잠이 들었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가방을 챙기니 버스는 이미 정류소에 도착하여 막 문을 열고 있었다. 서둘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침 찬바람에 남아있는 졸림마저 달아났다. 문자에 적힌 주소로 찾아가 보니 그 근처 아파트 단지 내 상가건물에 있는 태권도장이었다. 하지만 그곳엔 자라나는 새싹들이 아닌 스러지는 고목이랄까,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멀어야 육촌 내외의 친척들이지만 피의 친근함만으로 어색함의 농도를 낮출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통성명을 통해 수, 석, 철로 이어지는 세대별 돌림자를 확인하고 나니 금세 아재가 되고 조카뻘이 되었다. 그때부터 막힌 피가 뚫렸고 어색함은 흐르는 피에 쉬이 쓸려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도 같은 핏줄에서 오는 끈끈한 정을 느꼈다. 왠지 생김새도 비슷해 보이고 이곳이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아니지만 푸근한 고향 같았다. 이제껏 '끈기' 없는 도시에서 '윤기'나게만 살아왔던 탓인지 인간성 회복이라는 공동체의 원초적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촌수를 따져도 결국 어느 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가지들(twigs)'임을 확인하는 곳이 이곳 집성촌이겠다. 삐릭~ 뜬금없이 고풍스러운 문자 하나가 날아온 건 며칠 전이었다.
[관천파 시제 안내] O월 O일 O시에 OO아파트 내 상가건물 태권도장에서 時祭를 거행하오니, 崇祖敦宗의 마음으로 참석 바랍니다.
崇祖敦宗?... 인터넷에 찾아보니 '숭조돈종'으로 '조상을 숭배하고 그 종친끼리는 정을 두텁게 하라'는 뜻이다. 시제에 흔히 쓰이는 문구였다. 십여 년 전 아버지를 따라 한 번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문자도 보내고 올해부턴가 각자 십만 원씩 차비도 지급한다 하니 종중(宗中)이 많이 든든해 보였다. 뿌리라는 관념이 실체가 되어 다가온 기분이다. 아니, 꽁꽁 묶인 종중의 그 많은 땅이 십만 원씩 인심을 풀기 시작한 것이다. 항상 가봐야지 했었는데, 순간 '십만 원'이라는 말에 구미가 당기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겠다. 가기로 결정하고 나서 뒤늦게 '조상에 대한 예는 갖추어야지'라는 당위로 급 포장했으니 말이다.
널찍한 도장 마루에는 이미 창가 쪽에 세 개나 연이어 놓은 교자상이 있었다. 그 위에는 홍동백서, 조율이시, 좌포우혜 등의 질서 하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졌다. 새벽부터 서두르는 바람에 밥은 입에 대지도 못했으니 코끝을 스치는 전 부치는 냄새는 나의 식욕을 당겼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라는 유혹이 뱃속에서 꿈틀댔다. 하지만 일만 이천봉 절경보다 먼저인 식사라도 그것이 제사상이라면 언감생심이다. '그래 몇 번 절하고 향 피우면 금방 끝나겠지' 나는 침만 꿀꺽 삼키며 참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큰 오산이었다.
이유는 교자상이 세 개나 놓였다는 것에 있었다.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조상님이 드실 잔이 한두 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17개나 되는 잔을 일렬로 배치하기 위해서는 제사상이 길어야 했고, 그것을 하나씩 들어 술을 채워야 했기에 제사 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6대조 조상님부터 9대조까지 여러 번 지방(紙榜)을 갈아붙이며 '유세차~'로 시작되는 순서를 반복하니 절도 하고 무릎 꿇기도 수차례, 배는 더 고프고 나중에는 기운까지 빠져 어질어질했다. 여자들이 음식 차리는 정성도 만만치 않겠지만 남자들의 반복되는 몸놀림도 땀이 삐질 날 정도였다. 계속되는 고전 끝에 조상에 대한 경건함이 몸에 베일 즈음, '마지막'이라는 말이 들렸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이었기에 그것은 참배객들이 첨차 힘들어해 가는 것을 눈치챈 사회자의 배려였을 것이다.
그 와중에 사회자의 다음 지명을 받은 젊은 사람이 제사상 앞에 나가 술을 올렸는데 절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머뭇거렸다. 급기야 "에이, 절은 안 해요"라며 당당하게 물러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옛날 같으면 제사상 앞에서 무슨 불상놈 같은 짓이냐고 호통을 쳤을 테지만 곧바로 한 어르신이 "교회 다니는 거나?" 하면서 그냥 넘어갔다. 질타보다 이해가 넘실거리는 분위기였다. 시대가 바뀌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러면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도 넙죽넙죽 절만 잘했던 나는 뭐가 되나. 하지만 나 또한 당당했다. 절하지 않은 그 사람은 형식을 택한 것이고 나는 내용을 택한 것이다. 절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아닌 '조상에 대한 예'일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 않을까. 제사상 앞에서 주위의 시선에 굴하지 않은 것만이 종교적 신념을 지키는 행동일까.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소설에서 마지막 대목이 떠올랐다. 로드리고 신부는 결국 성화를 밟게 되는데 그때 예수님 말씀이 들려온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의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느니라."
한 시간 남짓 동안 현재는 과거에 감사를 드렸고 현존의 까닭을 옛것에 두었다. 함께하는 단체 행위에서 한 뿌리임을 확인하고 희박해져 가는 유대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거기에 시제의 의미가 있었다. 남자들만의 모임은 위로부터의 질서와 아래로부터의 존중을 중요시하는 시간이었다. 함께하는 밥상에서도 그런 시간은 연장되었다. 할아버지도 막내, 아버지도 막내인지라 나이에 비해 나의 서열이 높은 편이었음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앞에 앉은 칠십 대의 할아버지가 내 조카뻘이라는 것엔 좀 당황했다. '위로부터의 질서'로 나는 그가 따라주는 술을 받았고, '아래로부터의 존중'으로 그가 하는 존댓말에 어정쩡한 미소로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가 이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닐진대 잠시나마 익명의 도시생활이 편리는 한 것이구나 생각했다.
시간이 흘렀기에 다시 끓인 국 빼고는 음식이 대체로 식었지만 허기진 배고픔이 모든 것을 맛있게 했다. 따뜻한 음식을 조상님께 양보해서일까, 식사가 끝날 때쯤 지급된 십만 원의 차비는 꼭 조상님이 주시는 것 같았다. '쌧빠돈' 오만 원짜리 두 장을 받으니 추억의 세뱃돈 같기도 했고 건네주는 총무의 젊은 손길 뒤에 조상님이 아른거리기도, 했다. 감사한 마음이 절로 일었다. 역시 아래로부터의 존중은 현금에서 나오나 보다. 배도 부르고 지갑도 채워지니 이 훈훈한 분위기를 돈독한 친족 간의 정으로 돌리고 싶어졌다. 서울에서 먼 이 강원도 문막에서 나의 뿌리가 있고 느슨하게나마 혈육으로 맺어져 있다는 것이 진정 시제가 일깨워 주는 알맹이인 것 같다. 그 알맹이를 뿌리 깊은 나무는 매년 결실로 나누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