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그 이름만 봐도 성지순례로 더한 장소는 없어 보인다. 2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고통의 신음이 들리고 처참한 핏빛이 어른거린다. 아침부터 흐린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슬픔이 아닌 기쁨의, 고통이 아닌 환희의 눈물일 듯싶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여기저기 본당성당 깃발 아래 모인 예비신자들의 순례에서 알 수 있었다. 죽었기에 살아난 것이다. 그들의 피가 오늘 우리들의 신앙에 자양분이 되었음을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면 무엇으로 설명할까.
교리 시간에 배운 성경 속 사실들과 진실이 종교적 신념이 되고 어쩌면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신앙이 되기까지, 우리는 그 사이 어느 지점에 머물러 주님을 찾기도 하고 갈구하면서 삶의 위안을 받을 것이다.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명동성당이 이제는 빌딩 숲에 둘러싸여 왜소해 보일지라도 여전히 신앙의 안식처임을 예비신자는 느낄 수 있었다. 보이는 벽돌 마다 깃든 선배 신앙인들의 염원이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성당이 되어 우리를 맞이한다.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의 조화는 십자고상에 머리 숙이는 전례와 그 행위에 담는 경건함에 있다. 성모상께 합장하고 장괴틀에 무릎 꿇는 것으로 마음속 신앙심은 키워진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완성하기 위해 성지순례는 계속된다.
명동성당 옆에 위치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은 13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최초의 수녀원이라 한다. 일반인 출입이 제한되고 있지만 인솔하시는 수녀님의 섭외로 방문할 수 있었다. "여러분한테는 이번 기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입니다"로 시작되는 수녀님의 소개말에 순례자의 발걸음은 진지해지고 주변을 돌아보는 눈길은 경건해진다. 수녀원의 차분하고 고즈넉한 바깥 분위기는 그대로 건물 내부로 이어져 우리가 들어간 본당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수녀님들이 기도하고 있었는데 청아한 목소리는 천상의 음성이 되어 천창을 통해 쏟아지는 빛으로 보였다. 기둥도 없이 네모반듯한 본당 내부는 신앙의 열정으로 차올라 제대위의 십자가 세 개를 삼위일체로, 뒷자리에 앉은 우리를 신앙공동체로 묶어놓았다. 아무런 치장 없는 단순함이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된 셈이다. 건축을 전공한 나로서는 공간이 주는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
인솔자 중에서 누군가 오늘만큼은 예비신자의 '예비'는 빼라고 하였다. 출발할 때에는 몰랐으나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그 말에 동감되었다. 그만큼 많은 것을 보고 체험한 것이 그동안의 관념적 대상에서 구체적 확신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40여 년 동안 개신교 신자였을 때 해보지 못한 체험이었다. 그래서 성지순례가 세례 받기 위한 '필수'이고 교리 수업의 '절정'이고 그 후기는 기행문이 아닌 '감상문'이라고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