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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고돈쓰고 Sep 07. 2019

바람 불어 좋은 날

허공은 빈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채워져 있으며 때로는 성난 파도와 같이 휘몰아칠 수도 있다는걸, 오늘 알았다. 그리고 체험했다.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았기에 오늘 한 번 제대로 자신의 존재를 떨치고 있는가 보다. 얘가 이렇게 성질낼 때도 있구나. 처음은 아니지만 잊을만하면 발작하기에 늘 새롭다.


유리창을 흔들어대며 자꾸 비집고 들어오겠다는데 아주 외면하기가 그랬다. 앞뒤 베란다 창문을 조금 열어놨더니 기다렸다는 듯 마구 쏟아져 들이쳤다. 순식간에 집안의 묵은 공기를 밀어내며 신선함으로 무장한 신진세력들이 의기양양 집안 구석구석을 점령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 뒤로도 물밀듯(?) 밀려오는 바람의 행진은 목적지가 집안은 아니라며 바로 뒷베란다로 빠져나갔다. 머물면 그게 바람인가. 그래도 다녀간 흔적은 남긴답시고 현관의 센서등은 저절로 꺼졌다 켜졌다 반복한다. 혼자 사는 집이라 처음에는 깜짝했으나 알고 보니 깜찍했다. 강아지처럼 영역 표시하는 거나. 그래 너는 기압차를 메꾸는 자연현상에 불과하겠지만 누군가에겐 훨훨 날아다니는 자유이기도,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기도 하다. 한때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슬픔을 달래기도 했었지.


너를 쫓아 집 밖으로 나섰다. 휘몰아치는 바람으로 인해 단지 내 수목과 잡풀들은 몸살을 떨며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다. 뿌리부터 박혀있어 워낙 움직일 수는 없었던 것들을 미친 듯 흔들어주니 바람에 고맙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지, 쏴아 쏴아~ 수목은 화답한다. 몸살이 아니었구나. 흔들려야 꽃이 핀다고 했나. 그것은 스트레칭이고 운동이다. 나무의 목질은 더 단단해지고 가지는 더 튼튼해질 것이다. 그 바람에 여물기 시작한 은행은 우수수 떨어졌지만 그것들은 잔챙이겠고 남겨진 열매는 점점 더 크고 옹골찰 것이다.


근처 개울가에 가니 비로소 바람이 보였다. 저 멀리 수풀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이쪽으로 파도를 타며 다가오고 있다. 회오리 먼지까지 대동하고 개울가를 런웨이 삼아 위풍당당 입장을 한다. 오는가 싶더니 이미 나를 스치고, 아니 오늘만큼은 밀치고 벌써 내 뒤로 지나갔다. 어디 모델이 하나뿐일까. 또 앞에선 다음 타자가 수풀을 기울이며 등장이다. 밀려오는 파도 보듯 긴장된다. 아 오늘만큼은 바람에 시달려도 그의 입장에 박수를 보낸다. 안 그래도 지루한 일상이었다. 오늘 같은 포인트가 나를 뒤흔든다. 이미 내 안의 센서등도 여러 번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면서 환기가 되었다. 내일은 신선한 하루가 시작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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